‘하워드 휴즈’의 실화를 접했을 때, 궁금증은 갑부의 삶을 살다 간 인물이 강박증 환자라는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하였다. “왜, 억만장자는 강박증 환자일까?”. 질문을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무진장 많은 돈 때문에 한 평생 지 멋대로 살다간 남자가 왜 미국시민에게서 ‘신’처럼 추앙 받지?” 그다지 유익한 질문은 아니지만, 마틴 스콜세지가 이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을 때는 이야기가 180도 달라진다.
<갱스 오브 뉴욕>으로 인연을 맺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마틴 스콜세지에게 ‘하우드 휴즈’의 실화를 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했기에 여러모로, <에비에이터>는 그의 필모그라피에서 이례적인 작품일 것이다. 또한, 전작들과 비교해서 어떤 맥락성을 찾기도 불분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 사회의 이면을 파헤치는 작품들로 인정받고 성공한 마틴 스콜세지가 철저하게 자본가의 삶을 살다 간 하워드 휴즈를 보는 시각은 일반적 미국시민과는 그 격이 다를 것이라 기대하게 만든다. 결국, <에비에이터>에서 중요한 화두는 감독이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이데올로기일 것이고, 전작과의 맥락성을 찾는 일이다.
싸가지 없게 솔직하게 말하면, 하워드 휴즈는 부모 잘 만나 미모 출중하고 거기다 ‘부’까지 세습하여 당대 미녀 배우들과 화끈하게 놀아나다 지상이 지겨워서 하늘 위로 비상하고 싶었던 남자다. 평범한 소시민으로서는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지에서, 하물며 공기조차 다른 곳에서 생을 마감한 그에게 마틴 스콜세지는 무엇을 끄집어내고 싶었던 것일까? 당연히 답은 ‘미국’이다. 따라서 실존 인물을 그린 <에비에이터>는 감독에게 가지는 우리의 일반적 시선(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더러, 새로운 영화 해석을 요구하지 않기에, ‘상투성’의 멍에에 옥죄여 있는 꼴이다. 거대한 인물의 삶을 거대하게 스크린에 옮긴 작업 때문에 감독의 명성에는 또다시 동의하지만, 결벽증과 강박증으로 생을 마감한 하워드 휴즈의 비참한 말로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그러나 공허한 마음과는 달리, <에비에이터>는 ‘걸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위에 장황하게 언급한 의견을 한 단락 차이로 뒤집는 이유는 예상외로 간단하다. 한 개인의 삶을 조망한 카메라는 결코 관객의 동일화를 끌어 내지 못한다. 즉, 컷의 처리와 장면전환에서 드라마를 보듯 개인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워드 휴즈’와 ‘관객’을 단절시킨다. 카메라는 집요하게 하워드 휴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의 행적을 쫓지만 그의 심리를 알아낼 어떠한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즉, 미미한 역사를 지닌 대중은 한 개인의 거대한 삶 앞에서 밀려난다. 스크린은 안과 밖의 철저하게 구분하는 경계선임과 동시에, 개인의 역사가 대중의 역사를 ‘역전’시키는 분기점 역할을 한다. 결국, 감독의 의도적 ‘거리두기’로 인해 하워드 휴즈의 삶은 극적으로 느껴지며 그의 성공은 ‘신화’처럼 다가온다.
기이하고 모험적이던 한 남자가 역사에 남기까지 익명의 대중들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그를 ‘신’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개인의 온전한 삶을 방해하던 결벽증과 강박증에 대해서는 묻어버린다. 실존 인물에게서 미국의 역사를 읽어낸 감독의 ‘상투성’이 속된 말로 먹히는 까닭은 세기를 앞서나가는 개인의 행적에, 대중은 마치 현실의 이방인처럼 남겨지는 부조리한 상황 때문이다.
집단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소외감에 대한 두려움. 마틴 스콜세지는, 이 충격적인 ‘소외감’이 자발적으로 만든 신화에 ‘함몰’되고픈 대중의 욕망에서 비롯됨을 여전히 그 다운 방식으로 해석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