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가치로 따지자면 명품에 해당하는 이 영화의 영향은 비슷한 아류작과 졸작들을 속출해낸다. 때문에 <엑소시스트>의 속편들이 1편의 명성을 갉아먹는 졸작으로 평가받자, 관객들은 더 이상 속편 제작을 반기지 않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늙은 메린신부와 악령이 깃든 리건과의 심령대결은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를 비판하는 토론장이었으면 기만과 믿음의 차이를 역설하여 궁극적으로 신념에 대한 답을 끌어낸 장소로써 기능했다. 허나, 속편들은 원작의 아우라를 조금 변형하거나 혹은 스펙터클한 이미지로 그 자리를 대신하여 실망은커녕 코웃음만 치게 만들었다. 이들이 실패한 이유는 ‘엑소시즘’ 과정에서 파생된 공포가 선과 악의 대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각자의 믿음과 신념을 굴하지 않는 원형적 내면에서 나온 공포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결국 윌리엄 프레드킨의 <엑소시스트>는 스스로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고 선한 자와 악마의 대결을 그린 공포영화들은 언제나 비슷한 ‘감흥’만 안겨줄 뿐이다. 어찌됐든 더 이상 속편 제작소식에 관객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 때쯤 Morgan Creek Productions은 <Exorcist-The Beginning>이라는 제목으로 속편 아닌 속편을 제작해 선보인다. 속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거의 완성된 작품을 내 논 폴 슈레이더 감독을 중도 하차하게 하고 레니 할린 감독을 급파해서 만든 <엑소시스트-더 비기닝>의 일차적 평가는 그간의 속편보다는 그나마 낫다는 것이다.
‘시작’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엑소시스트>의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메린신부(스텔란 스카스가드)의 굳건한 믿음과 신념이 어떻게 해서 견고해졌는지 원인을 찾아간 작품이다. 2차 대전 당시 나치들의 유태인 학살을 목격한 뒤로 믿음을 잃은 자가 되어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고고학자 메리. 과거 신부였던 그에게 아프리카 오지에서 기독교가 전파되기도 전에 만들어진 교회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땅 속에 묻힌 교회에서 악마의 표시를 찾아오라는 의뢰인의 주문을 받고 찾아간 야생의 땅에서 메린는 악령과 처음으로 조우한다.
<엑소시스트-더 비기닝>에서 감독이 누구인가를 따지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악령과의 심령대결을 통해 믿음을 찾아가는 메린신부의 심리이동 과정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야 관객인 우리에게 공포심이든 믿음이든지 간에 어떤 정서적 반응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상반되는 문명을 빗대어 메린신부의 잃어버린 믿음과 심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상반되는 문명의 충돌에서 잃어버린 믿음과 공포를 끄집어낸 <엑소시스트-더 비기닝>은 여전히 ‘시작’과는 다른 의미의 <엑소시스트> ‘변주’ 작품일 뿐이다. 공포를 스펙터클로 치환한 모습은 자제했으나 굳이 아프리카 오지에 악마가 봉인되어 있었다는 설정은 서구문명의 이기적 우월감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달리 생각하면 더 이상 근원을 건드리는 공포를 현대문명 안에서 재생산하기는 어렵다는 말로 해석되어 질 수 있다. 감독은 이런 제한적 단점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정해준 범주 안에서 새롭지는 않지만 충실한 선과 악의 ‘충돌’을 담아낸다.
공포가 아닌 ‘믿음’의 시작을 찾아가는 영화적 ‘시선변화’를 인지한 상태에서 본다면, <엑소시스트-더 비기닝>은 졸작의 악명에서 벗어난 걸작의 ‘범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