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피아노 교수인 여주인공 에리카의 이야기입니다. 할리우드식이라면 드라마<섹스 앤 시티>의 뉴요커지만 프랑스 영화 속의 에리카는 보다 현실속의 여성에 가깝습니다. 그녀는 성공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양보하고 마초와 여성 혐오자(misogynist)들 속에서 냉철하게 사는 40대의 성공한 여자입니다. 문제는 그녀가 거세되지 않는 숨겨진 욕망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쉽게는 '변태군', 하면 되지만 감독은 그녀를 통해 '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은 환유'라는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보여주는 라캉식 접근을 합니다. 게다가 영리하게도 감독은 주인공들의 마음을 의도적으로 안보여 줍니다. 관객을 더욱 낯설고 불편하게 만듭니다.
영화는 그녀와 어머니와의 난투 전으로 시작됩니다. 성장한 그녀가 밤늦게 들어왔다는 단순한 발단이 싸움의 이유입니다. 어머니는 그녀의 지갑을 뺏고 혹 연애질을 했을까 봐 뒤적거리며 서로 머리카락을 쥐 뜯으며 싸워 됩니다. 딸이 연애를 하면 경제적인 수입이 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에리카와 어머니와의 관계는 좀 독특합니다. 어머니는 에리카의 모든 생활과 욕망을 통제하고 의존하는 대상으로 오이디푸스 이전단계(pre-Oedipal)의 부모를 그립니다.
영화는 현실과 달리 별 생각 없이 보여주는 장면이란 거의 없습니다. 반면에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은 에리카가 자신의 욕망을 거세당하지 않고 분출하는 면에서 그녀가 페미니스트라는 시각을 던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도라의 경우>를 통해 에리카유형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인 여성처럼 유아기 때 어머니를 질투하고 남근을 숭배하고 과정을 통과하기보다 '도라'나 '에리카'처럼 남근(아버지)과 동실시하는 남성적인 요소를 가진 이도 있다고 말합니다. 영화 속에서 에리카가 자신의 성기를 절단하는 이유도 어쩌면 그녀가 도라 유형이기 때문인 듯 보입니다.
그녀는 연하의 제자 월터와 사랑에 빠집니다. 처음 만날 때 월터는 슈베르트 곡을 칩니다. 에리카의 18번은 슈베르트와 슈만 곡입니다. 두 작곡가 모두 동성애자거나 양성애자 이었듯 영화 속에는 이처럼 탄탄한 원작을 바탕으로 하기에 나올법한 장면이 내러티브를 살려줍니다.
미카엘 헨리케 감독은 김기덕 감독과 닮았습니다.
밝음보다는 눅눅한 어둠 속에서 사회와 욕망으로부터 소외된 주인공들을 보여줍니다. 보여주는 방식도 폭력적이고 왜곡된 장면이라 때로 잔인하거나 너무 충격적이라 불편하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두 감독의 다른 점은 무엇보다 미카엘 헨리케 감독이 페미니스트들이 좋아하는 라캉을 통해 페미니스트 상을 보여준다면 김기덕 감독은 대게 지독히 마초인 남 주인공 상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보여주는 면만 다를 뿐 실은 우리의 세상을 보여주는 동전의 앞뒤랑 같다고 여깁니다. 억압이 있을 때 반란이 있으니까요. 이제 에리카가 변태일지 페미니스트일지는 관객의 몫 같습니다. 감독은 그 몫을 열린 결말로 모호하게 남겨둡니다. 근본적으로 결핍된 욕망을 채울 수는 없지만 에리카를 정말 페미니스트나 혹은 변태로 만들 힘도 관객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에리카와 월터는 우리들의 마네킹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