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이노센스>는 <공각기동대>가 구체화한 근미래상을 심화/확대하여 제시한다. 이건 달리 말해 <공각기동대>에 익숙한 혹은 <공각기동대>를 미리 ‘학습’한 관객이 <이노센스>의 복잡하고 난해한 설정을 이해하는데 한결 유리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가령 ‘고스트 해킹’에 관한 사전지식이 없다면 버트가 상점에서 위기에 빠지는 장면은 뜬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또한 뇌 이외의 신체는 모두 기계화되었지만 인간의 영혼을 갖고 있는 버트가 영혼없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로봇 인형과 벌이는 실존적 대결의 의미는, <공각기동대>의 중요한 철학적 모티브였던 데카르트의 ‘자동인형’에 대한 이해를 통해 명확해질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런 ‘준비된’ 관객에게조차 이 애니메이션은 엄청난 지적 도전이 될 것이다. 버트는 쿠사나기 소령보다 자신의 정체에 대한 실존적 고민은 덜 하는 대신, 새로운 골치아픈 질문들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영혼(고스트)마저도 비트화되어 네트를 이동하는 ‘의식의 네트화’가 이루어지고 그런 의식들이 조작가능해진다면, ‘가상’과 ‘현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인간은 왜 자신을 닮은 기계를 만들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버트와 그의 파트너 토구사는 성경에서 시작하여, 밀턴과 데카르트, 그리고 공자의 격언에서 발췌한 인용구로 이루어진, 길고 긴 대화를 나눈다. 정말 저 난해하고 심각한 대화는 이 애니메이션의 핵(核)이거나 독(毒)이다. 어떤 관객들은 그 말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노센스>를 다시 볼 것이고, 다른 관객들은 관람석을 박차고 나설 것이므로.
지나치다 싶을 난해함이 <이노센스>의 관객을 열혈팬과 불평분자로 나눌지도 모르지만, 이 애니메이션의 비주얼적 완성도에 대해서는 분명 공통된 합의를 이룰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진화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이라는 현지 언론의 호들갑스런 찬사가 낯간지럽지 않을 만큼 현란한 화면을 보여준다. CG의 입체감과 2D의 수작업적 섬세함을 조합시킨 영상은 놀랍도록 섬세하다. 광고판이나 음료수 라벨, 건물 내장재의 질감까지 살려낸 극사실주의는 혀를 내두를만큼 정교하다. 특히 가와이 켄지의 음악에 맞추어 펼쳐지는 웅장한 중국식 퍼레이드는 그 규모와 사실감에 있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제작 협력'을 얻고, 관객 12만명이 든 영화의 속편이라는 인상을 풍기지 않으려고 <공각기동대 2: 이노센스>라는 제목을 <이노센스>로 바꾸어 홍보해도, 이 영화의 흥행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철학적 난해함과 밋밋한 사건 전개는 이 영화의 관객을 소위 매니아층으로 한정지을 소지가 커 보인다. 하지만 어떤 애니메이션이 ‘걸작’이 되는데 ‘흥행여부’는 필요조건이 아니다. <이노센스>는 오랜 세월 기다려온 보람이 있는, ‘걸작’ 애니메이션의 완성도 높은 속편이다. ‘재미’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깊이와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애니메이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