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미희, 이순재가 주연한 동명의 드라마에서 모티브만 따온 <얼굴없는 미녀>는 ‘원혼’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더더욱 ‘호러’ 영화도 아니다. 버림받을까봐 두려운 나머지 경계선 신경증을 앓고 있는 지수(김혜수)와 아내를 잃어 외로운 정신과 전문의 석원(김태우). 이들은 의사와 환자로서의 금기를 깨고 불안한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영화의 스토리만 보면 한 남자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지수와 석원이 그려내는 거짓과 진실, 과거와 현재는 공간 안에서 회귀의 그물 망을 침으로써 끝없이 스스로를 복제한다. 때문에 지수의 과거 기억은 석원의 현재가 되고, 영화초반 석원의 처지는 민석(지수의 남편)에게 동일하게 반복된다. 세 사람은 각각의 복사본이자 피사체다. 그러나 끝없이 복제되는 과정 속에서 ‘객관적인 실체’는 사라지고 마주하는 거울에 층을 이루며 반사되듯이 경계의 출구는 멀어진다. 마치 그물에 걸린 나약한 물고기들처럼 인물들은 공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지수에게 향한 걷잡을 수 없는 석원의 욕망은 최면을 통해 보상받고 파멸하지만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인물이 아니라 ‘공간’이다. 결국 <얼굴없는 미녀>는 인물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공간의 이야기이다.
전작 <로드무비>에 비해 <얼굴없는 미녀>의 공간은 인공적인 양식미가 가득하다. 황폐해진 공간에 놓인 캐릭터를 통해 현대인의 내면을 이야기한 <로드무비>의 자연적 공간은 이번 영화에서는 초현실적 세트공간으로 치환된다. 따라서 <얼굴없는 미녀>의 두 주인공인 석원(김태우)과 지수(김혜수)의 트라우마는 각자의 공간에서 ‘의미화’ 되고 ‘충돌’한다. 공 들여 만든 지수와 석원의 공간뿐만 아니라 그들이 스치는 거리의 풍경마저 주인공의 내면을 반사한다. 그러나 “저는 할 말이 많은 여자여요”라고 말하던 지수와는 달리, 인물들에게서 공간을 제외하면 이들의 상실감은 설명될 길이 없다. 이렇듯 영화에서 공간은 또 하나의 ‘주인공’이자 침묵의 ‘나레이터’가 된다.
|
감성을 형상화한 공간과 그 안에서 유령처럼 부유하는 인물들. 휘트니스클럽의 원형트랙은 지수와 석원의 재회 장소이나 결국엔 혼자 남게되는 현대인의 적막감을 이미지화한다. 또한 거기에 덧칠해진 화려한 색감들은 내면이 텅 빈 인물들을 흡수해 공간에 가두어 버리는 족쇄로써의 의미를 갖는다. <얼굴없는 미녀>안에서 공간은 내면적 결핍감을 앓고 있는 인물들을 분신으로 내세워 소통을 시도하나 태생적 성질로 인해 각각의 영역에서만 머물 수밖에 없다. 즉, 의사 석원과 환자 지수가 금기를 깨는 경계에 놓여져 있더라도 자신이 만든 의식세계 안에서 결국에는 헤어나올 수 없듯이 말이다.
<얼굴없는 미녀>는 감성의 과잉표현으로 이성적 이해능력을 마비시키는 작품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 편의 초현실주의 그림을 감상한 듯한 착각을 주는 <얼굴없는 미녀>는 이해는 어려우나 감성만큼은 공감하게 할 줄 아는 스타일이 살아있는 무드영화다.
그래도 이 영화를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관객을 위해 한마디 충언하자면, 미술의 한 작법인 데칼코마니를 기억하길 바란다. 반으로 접은 종이의 한쪽 면에만 물감을 붇고 다시 반으로 접어서 찍어낸 이미지가 아무리 나비와 비슷하게 보이더라도 그건 나비를 생각하고 그린 그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얼굴없는 미녀>도 현대인의 그림자를 스크린에 투영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