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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서 이라크로 밀수품을 운반 할 때 엄청난 추위와 눈밭을 이겨내야 한다. 견디기 힘든 추위를 이기기 위해 중요한 운송 수단인 말과 노새에게 독한 술을 먹여 취기로 짐을 운반하게 만든다. 그래서 제목에 ‘취한 말들’이 들어간다. 그런데 취한 말들이면 말들이었지 ‘위한 시간’이라는 단어는 왜 들어갈까?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혹한 속에서도 취한 말들과 함께 시간을 공유하는 주체를 ‘어린이’로 잡았다. 때문에 철학적인 영화 제목은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고통’과 ‘수난’의 유년史를 적절하게 표현한 문장이 된다. 제목의 의미를 알아 갈수록 이란 어린이들의 잔혹한 현실은 스크린을 바라보는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할 것이다.
이번만큼은 강력하게 이 글의 주제(or 의도)를 먼저 밝힌다.
부시, 당신이 꼭 봐야 하는 영화는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 아니라 바로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일세!
근대공업화시대에서 지금 같은 ‘어린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10살도 안된 아이들이 공장에서 하루 14시간 이상의 노동을 했으면 그들은 단지 나이가 적고 체구가 작은 노동력을 가진 일꾼이었을 뿐이다.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지대에 있는 작은 바네 마을의 어린 다섯 형제도 전쟁 때문에
‘노동력’을 가진 존재로서 인식 될 뿐이다. 밀수입을 하던 아버지는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고 12살 난 아윱은 꼬마 가장이 된다. 그에게는 누나가 있고 귀여운 여동생이 있으며 갓난아기 동생이 있다. 거기다 나이는 아윱보다 3살이나 많지만 불치병으로 인해 갓난아기의 체구를 가진 형임과 동시에 동생인 마디가 있다. 아윱은 마디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밀수업자의 심부름꾼이 되지만 노임은 받기 어려웠고 고작 버는 돈으로는 공부에 재능 있는 여동생 아마네의 노트를 사주기에도 빠듯하다.
작은 손은 힘든 일과 추위로 인해 거칠지만 매일 집에만 누워있는 마디를 위해 아윱은 ‘건강한’ 보디빌더의 사진을 사다주는 다정한 가장이다. 그는 12살에 가장이 되어버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보다 단지 아마네가 공부를 지금보다 더 잘하기를, 마디가 수술을 받아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유년을 담보로 한 가혹한 시련들은 낮게 표현된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요즘은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이 준 참혹한 현실을 냉정하게 상징하고 있다. 카메라는 아이들의 눈빛은 가까이 잡아내지만 관객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다가서지 않아 자꾸만 우리의 울음을 안으로 삼키게 만든다. 때문에 아윱 형제의 유년史는 영화가 끝난 뒤 가슴이 뭉글어져 소리마저 나오지 않는 ‘통곡’을 뽑아낸다.
12살에 어른이 되어 버린 아윱은 가장의 ‘책임’은 있지만 ‘권리’는 없는 소년이다. 마디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눈밭을 헤치면 먼길을 따라 오늘도 밀수업을 하는 소년가장. 이 모든 수난의 시절을 선사한 어른(삼촌)은 가장의 책임은 그에게 요구하면서 권리는 앗아갔다.
동생들을 위해 불만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한 ‘가장’ 아윱에게 일방적으로 누나의 결혼결정권을 뺏어간 삼촌의 행동은 날이 선한 칼날 같아 부조리를 목격하는 우리의 눈을 찌를 것이다. 다실 말해 이란의 어린이들은 유년을 ‘담보’로 세상을 버텨내려고 하지만 시대는 그들에게 전혀 ‘보상’할 맘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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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를 시집 보낸 대가로 받은 노새는 그래서 그들에게 앞날의 희망이 될 수 없다. ‘노새’는 죽을 때까지 짐을 끌어야 하는 동물이다. 노새는 아윱이며 동시에 이런 현실에 처한 이란과 이라크의 모든 어린이들의 ‘미래’를 상징한다.
‘미래’라는 단어 속에는 앞날에 대한 ‘희망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의 아윱에게는 미래는 단지 지금보다 조금 나은 생활을 말할 뿐이다.
때문에 마디의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노새를 팔아야 하는 아윱의 가혹한 현실은 결코 그들에게 희망적인 ‘미래’가 없음을 극명하게 암시한다. 술을 잔뜩 먹인 노새를 붙잡고 국경을 넘어야 한다고 하얀 눈밭에서 울부짖는 아윱.
이젠 마디를 포기해도 그를 원망할 사람은 없는데 아윱은 눈밭에서 울기보다 위험한 국경을 가족을 위해 넘어서는 길을 택한다.
현재 미국이 이라크을 상대로 벌이는 살육의 역사는 오늘도 바네 마을에서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술 먹은 노새를 끄는 ‘아윱’에게 희망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취한 말이 국경을 넘듯이 이 시대의 아윱들도 잔혹한 유년을 시대에 맡기고 전쟁의 역사를 가로지를 것이다.
이란의 아이들이 유년시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노새의 바구니에 짐짝처럼 실려 가는 마디 같은 처지일 때만 가능하다. 마디는 아윱이 영위하지 못한 유년시절에 갇힌 인물이다. 성장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을 가진 마디는 바로 어른이 되어버린 아윱의 현실을 잔혹하게 드러내주게 하는 존재다. 하지만 마디는 성장하기 않기에 아윱처럼 (희망적인)미래가 없다. 때문에 마디는 아윱의 기형적인 카피 본이다.
미국이 뺏어간 것은 석유가 아니라 마땅히 ‘희망’을 꿈꾸는 뜻이 담긴 아이들의 ‘유년시절’이다.
마이클 무어는 <화씨 9/11>에서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부모를 찍어 전쟁의 비합리성을 감정의 최고점에서 고발했지만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삶 자체에 카메라를 들이밀어 전쟁을 찍지 않아도 이기적인 전쟁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감정을 분노케 하여 현실의 부조리가 옳지 않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보다 더 사실적인 영화로 우리의 ‘이성’을 단지 울게 만든다.
필자 간곡하게 부탁한다.
부시, 제발 이 영화를 보시오.
당신이 저지른 중동 지역의 전쟁이 당신에게도 딱 한번밖에 없었던 유년시절을 그들의 인생에서 ‘제거’한다는 사실을 제발 이제라도 깨달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