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화씨 9/11'의 메시지를 즐겨라!
2004년 7월 21일 수요일 | 영화평론가 박소진 이메일


이라크 전이라는 자해공갈

2000년이 되기 얼마 전, 이런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곤 했다. 미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지 부시가 당선되고 2002년에 한나라당의 이회창이 당선되면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터질 것이며 그러면 우리는 모두 짐 싸들고 화성으로 떠나야 할 거라고.......

그러나 결과는 미국의 이상한 직간접 혼용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부시가 당선되고 2년 후 한국에서는 노무현이 당선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황금비율인지,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인지 아니면 알고 보니 최악의 선택이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태평양 건너의 머나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미국이 북한에 대해 미 본토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떠벌리는 와중에도, 정확히 10년 전에 ‘작전계획 5027’이라는 이름 하에 전쟁위협에 내몰렸던 한반도는 지금 그나마 찻잔 속 태풍을 대하듯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한 것 같다.

파병이라는 수렁에 빠져드는 줄도 모르면서 말이다. CNN과 알자지라 방송이 경쟁적으로 전쟁을 생중계하며 이라크 전쟁이 터졌고 3개월 만에 전쟁이 끝났다고 했지만 이 전쟁은 모양새가 뭔가 이상하다. 이라크 전쟁은 마치 가해자가 피해자인 것처럼 연기하고 증거를 조작해내는 자해공갈단의 소행처럼 아무런 증거도 없이 가해자가 없이 피해자만 존재하는 이상한 전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데도 극구 우기며 의심자체만으로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는 부시는 왜 단지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라며 이라크를 ‘공공의 적’으로 믿는 것일까?

미국은 현재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혀있는 거대한 공룡처럼 보인다. 9.11이라는 미국 심장부 한가운데를 강타한 테러의 위협에 스스로를 피해망상증 환자로 둔갑시켜버렸다. 세계무역센터에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만만한 상대들이 필요했던 것이며 이 기회에 부시에게 대드는 종자들을 쓸어버릴 기회라고 판단했다는 것이 마이클 무어를 비롯한 좌파진영의 판단이다. 다수의 사우디 인들로 구성된 알 카에다 조직에 대한 복수를 대량살상무기도, 알 카에다와의 연계도 없는 이라크에다 냅다 내질러버린 것이다. 우스꽝스런 이 코메디의 결과는 기대와 달리 너무나 참혹하지만 우리는 이 비극을 인정하고 싶지도, 이라크 땅의 피에 젖은 고통을 애써 모른 채 하고 싶은 우리는 아직도 기억한다. 미국의 공습과 연이은 점령이 9.11에 대한 복수인 셈 치며 내심 승인하거나 모른 채했던 일들을 말이다. 이미 우리는 이라크 전쟁의 잠재적 공범이다. 후세인이라는 독재자라면 맨 먼저 쿠르드 족에 대한 생화학 무기 공격과 쿠웨이트 침략을 떠올리도록 훈련된 우리는 기꺼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마음 속으로 승인해주었다. 해프닝으로 끝난 휴거나 Y2K에 대한 괴담이 새천년이 밝으며 일순간 사그라졌었듯이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잘 가란 말 한마디 건 낼 여유도 없이 같이 사라져버렸다.



이라크만 의심하는 데카르트주의자 vs 카메라를 든 사나이 무어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는 바로 희망이 사라져버린 시대, 진실이 거짓에 둘러싸여 포위된 상황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공격으로 시작한다. 주연배우 부시는 마이클 무어 감독이 애지중지 하는, 가장 스케일이 거대한 비극적 코메디를 구사하는 캐릭터이다. 그는 이라크에 대해서만 가장 극단적인 데카르트적 태도로 끝없는 의심과 회의에 빠진 채 토마호크와 스텔스기를 날리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이다. 마이클 무어가 명시적으로 부시의 재선을 막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며 정치적으로 조롱하는 이유의 핵심은 그가 사실 뉴욕 9.11 테러의 주범인 빈 라덴 일가와 사실 매우 절친한 사이라는 점이다.

그는 전쟁광처럼 보이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라는 점은 그가 사우디의 왕족 일가로부터 벌어들이는 액수가 대통령 연봉을 껌 값 정도로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무어가 바라보는 현실은 매우 단순 명확하다. <화씨 9/11>이 구사하는 직접적인 몽타주에 의한 정치적 조롱이 만들어내는 장면들이 미학적으로 탁월하다거나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였다거나 하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가 선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소 직설적인 몽타주이긴 하지만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해야 한다고 본다. 카타르시스라는 감정적인 순화는 어떤 억눌린 감정이 툭 터져 나오면서 정화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물론 그것은 단지 다큐멘터리에 국한될 뿐 현실로 곧바로 이어지진 않는다.

그런데 한 번쯤은 이런 지나간 경구에 위안받는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이 꾸는 꿈은 단지 꿈이지만 모든 사람이 꾸는 꿈은 현실’이라고. 마이클 무어가 꾸는 꿈 즉, 부시가 올해 11월에 얼굴이 굳어져 백악관 집무실에서 짐을 싸서 나오면서 폐를 끼쳐서 미국인 뿐 만 아니라 세계인들 앞에게 쪽팔려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며 퇴장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꽤나 짜릿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무어가 꾸는 다큐멘터리를 통한 꿈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큐멘터리가 더 이상 진실을 보여주는 것 그 자체만으로 곧바로 진실이 될 수는 없다는 각성에서 출발한다. 이제까지 많은 다큐멘터리가 단지 기록하는 것에 머물렀다면 이제부터의 다큐멘터리는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더 많은 무게중심이 두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르크스 식으로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에 관해서는 좀 더 깊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해석을 넘어선 실천과 변혁이란 영화 안과 밖의 문제에 걸쳐져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겠다. 단지 하나의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저 관람하든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이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람이라는 다분히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을 넘어 이 후 지속적인 부시반대와 이라크 전에 대한 사려 깊은 생각을 하는 등의 생활 속의 변화들로 말이다. 그러나 아마 이 두 가지 방향은 모두 어쩌면 하나의 출발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아예 보지 못할 대다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다큐멘터리가 직접적으로 부시의 대 이라크 전쟁과 한국의 파병방침에 대한 입장의 변화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화씨 9/11>이라는 다큐멘터리가 포함된 현실과 자신의 관계에 의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영화 하나가 세상을 바꿀 확률은 부시가 스스로 개과천선할 확률과 맞먹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미국이라는 거대한 탐욕의 대륙을 떠받치고 있는 군산복합체의 경제구조가 이미 미국인들을 포함해 다수의 세계인들을 전쟁과 자본주의의 끈끈한 관계를 하나의 이미 전제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파병에 나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미동맹이 아니라 한국경제의 미국에 대한 예속 때문이라는 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으나 인정하기엔 너무 쪽팔리고 변화시키기엔 너무 위험한 ‘진실’이라는 점이다.

그럴 때 우리는 <화씨 9/11>에서 한 젊은 아들을 이라크에서 잃은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애국자였으나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남는 질문은 국가에 대한 신성한 의무가 도대체 아들을 왜 죽음으로 내몰아야 했을 까라는 질문을 되뇌이게 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은 아름다웠던 이라크의 전쟁에 대한 추억을 한 순간에 악몽으로 뒤바꿔버린다. <화씨 9/11>이 소위 ‘진실이 타는 온도’ 라면 그것은 곧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9.11이라는 거대한 복수극을, 작게는 김선일씨의 피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도 같다. 우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인과응보를 선택하며 모종의 파병결의를 소극적으로 반대하거나 눈감아버림으로써 미래의 복수를 내다보거나 복수극의 한가운데 섶을 지고 뛰어드는 식의 무모한 도발을 이라크 사람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가의 선택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화씨 9/11>은 실천의 무기로서의 다큐멘터리의 전통이 거의 희미해질 무렵 가장 주관적이면서도 선동적인 방식으로 예전의 방식을 다시 결합시키려 이데올로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영화가 실제의 사건을 뚝 잘라 담아내기 때문에 ‘실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이제 중세에서나 가능한 먼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고 이제 확신할 수 있을 즈음 바로 그 세상이 이데올로기로부터 종언을 고할 것이라는 믿음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나 마치 부시만 사라지면 전세계가 다시 행복해 질 거라는 마이클 무어의 편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부시의 재선을 막는 것이 인류의 행복에 조금 더 나은 기회를 보장할 것이라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무어와 마찬가지이지만 스스로 자신이 미국을 일깨우는 일에 앞으로도 집중할 것이라는 다짐처럼 나 또한 미국이 단지 한 사람의 지도자가 바뀌는 것만으로 제국주의적 틀에서 벗어나리라고 생각지는 않기 때문이다.

<화씨 9/11>은 단지 하나의 다큐멘터리이며 여기서의 논점은 이 다큐멘터리가 이전의 다큐멘터리적 전통과 어떤 점에서 다르며 그것이 실체적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자아낼 것인가가 문제될 뿐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하나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믿는 것에 대한 판단은 우리가 노무현을 뽑기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화씨 9/11>의 메시지를 즐겨라!

<화씨 9/11>은 뉴욕 마천루의 가장 높은 곳에서 증오에 의한 정치적 복수극이 저질러지고 있을 즈음 부시는 눈만 말똥말똥 뜨며 7분여간을 그 자리에서 머무르는 장면을 보여준다. 뉴욕타임즈가 평했듯이 이 장면만으로도 부시의 대통령 직에 대한 수행능력을 충분히 의심케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부시는 9.11 이전 재임 기간의 40퍼센트가 넘는 시간을 휴가로 보내며 ‘정의로운 미국의 풍요로운 삶’을 앞장서서 구현해왔다. 무어는 그러나 그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 사실은 주기적으로 끊임없이 전쟁을 생산해내는 군산복합체라는 점을 <볼링 포 콜럼바인>과 <멍청한 백인들>이라는 책에서 까발린다.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플린트 시를 관통해 지나가는 미사일은 은연중에, 거의 무의식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미국민들의 정신세계에 깊숙이 침투하는 모습의 은유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화씨 9/11>의 메시지는 확연하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최후의 시민적 권리를 통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음 대선에서 부시를 낙선시켜야만 한다. 만약 <화씨 9/11>의 상영 이후 한국에서 파병이 재검토될 정도의 여론이 형성된다면 그것은 아마 칸 영화제에서의 수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 영화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8 )
qsay11tem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2007-11-27 12:13
khjhero
보장이 되니깐..저런 영화를 만들죠...ㅎㅎ   
2005-02-15 20:45
soaring2
그러게요..영화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같아요   
2005-02-13 14:32
cko27
조금 심했단 생각이 들긴하지만 역시 미국은 저런거 개봉해도 정부에서 아무런 조치도 못하니. 정말로 자유의 나라인것 같음.^^   
2005-02-06 18:29
jju123
한나라의 국민으로서~ 안타까움이 밀려오지만~ 다덜 홧팅   
2005-02-05 20:08
jju123
실망감과 안스러움~ 좀더 열심히 살어야겟다는 생각이 들엇습니다~ 다덜 힘네세요   
2005-02-05 20:06
tkael
우리나라 다큐였으면 아마 어떤 결론을 내려놓고 만들었을것이나 마이클무어 감독영화의 좋은점은 어떤 결론을 이미 가지고 만든 다큐가 아니라 보면서 결론이 지어지는 다큐를 찍어서 볼만해따..   
2004-07-25 04:55
dapoet
박소진씨 글 잘 읽었습니다. 이 영화를 전 어제 보았습니다.잠시 무력함을 느꼈고, 분노스러웠는데, 고 김선일씨가 떠올라서였습니다. 다행히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오늘 광화문에서 있을 파병반대집회에 나가보려합니다. 혼자 꾸는 꿈은 꿈이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다. 마음에 와 닿는군요. 수고하십시오.   
2004-07-24 16:21
1

 

1 | 2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