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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참을 수 없는 사랑>부터 할리우드 스타를 기용하던 코엔 형제는 이번에도 톰 행크스라는 최고의 스타를 캐스팅함으로써 <레이디킬러>의 웃음을 과대한 스타성에 기대는 경향을 보인다. 대중적인 스타를 기용하는 것이 코엔 형제가 자신들의 추종자를 벗어나서 불특정한 대중과의 호흡을 위한 제스쳐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어느 부분에 오면 나름대로 코엔이구나 의식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 코엔 매니아에게는 다음 작품에 대한 여전한 기대를, 일반 관객에게는 대중적 재미를 주는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1955년 영국에서 제작된 동명타이틀 영화를 리메이크한 <레이디킬러>는 누군가의 말처럼 리메이크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인지 몰라도 사실 코엔형제 매니아에게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작품이다. 장르변주와 그 안에서 특유의 상황 뒤틀기로 고전적 할리우드 작법에서 벗어나는 순간의 알싸한 짜릿함을 주던 냉소적 웃음은 이번 영화에는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 하나만 가지고 <레이디킬러>를 본 필자는, 사실 코엔형제에 대해 무지하기에, 후반에 올 수록 배꼽이 빠질 듯한 웃음을 관객석에서 날리고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 툭하면 동네 보안관에게, 타락과 같은 말인, 불량한 기미를 보이는 마을 주민을 고자질하기 좋아하는 미세스 먼순(일마 P. 홀)의 집에 골드스웨이트 히긴슨 도르 3세 교수(톰 행크스)가 세 들어오면서 사건은 발생한다.(타락에 관해 결벽증같은 반응을 보이는 문손부인의 행동은 의미심장하다)
애드가 앨런 포의 시를 멋들어지게 낭송하고 바로크 음악에 조예 깊은 도르박사는 수상한 사람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지하실에서 먼순부인을 속이고 일을 꾸민다. 이들은 먼순부인의 집 가까이 있는 카지노를 털 계획을 가지고 있는 악당 5인조로서 완벽한 전술아래 일을 척척 진행시켜 나간다. 하지만 제목부터 ‘레이디’킬러인 것을 보자면 미세스 먼순은 5인조에게 일을 진행시킴에 있어 걸림돌이 되고 카지노를 터는 것보다 그녀를 제거하는 게 위기를 벗어 날 수 있는 해결점이 될 정도로 상황은 점차 꼬이게 된다.
기가 막힌 범죄영화를 지금까지 아주 잘 보아 온 우리에게 5인조의 카지노 습격사건은 큰 메리트가 있는 사건이 아니다. 때문에 코엔형제가 어떻게 원작을 재해석해서 우리에게 스토리텔링했는지가, 코엔이 앞에 붙는 <레이디킬러>의 진정한 재미를 찾는 일이 될 것이다.
무난하게 진행되던 이야기는 톰 행크스가 연기한 도르박사가 마을 어르신들 앞에서 앨런 포의 시 <헬렌에게>를 낭송하는 순간부터 급진전한다. 도르박사의 이중성과 잔인함이 시 낭독 후, 먼순부인의 도덕적 선택의 강요와 맞물림으로써 그들이 말하는 ‘코엔다움’이 드러나는데 이때부터 코엔형제는 5인조 강도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죽음의 변주를 반복의 형태를 빌려 (그들이 말하는 ‘코엔다운’) 재치로 이어나간다.
우수한 두뇌,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폭력성(힘)을 가진 5인조가 왜 골다공증 환자이자 깐깐하지만 도덕적 윤리의식의 표범인 미세스 먼순에게 쩔쩔매는 것일까?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코엔다움’은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물에서부터 찾아야 될 것이다.
그녀는 어느 모 대학에 매달 5달러씩 기부를 한다(지인의 조사에 따르면 이 대학은 몇년전까지 흑인입학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서 더 편협하게 해석해서 들어가자면 원작과는 다르게 먼순부인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다. 또한 5인조 중 유일한 흑인인 거웨인(말론 웨이언즈)에게 그녀는 돼먹지 못한 자식이라면서 허점 하나 없는 내공의 연속 뺨따구 때리기를 자행한다. 미세스 먼순이 유일하게 폭력을 쓴 사건은 거웨인을 때린 사건뿐이며 그녀는 변함없이 극이 끝날 때까지 도덕주의적 행동을 강요하면서 수행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포인트를 잡아 낼 수는 없지만 무언가 위에 기술한 말들에서 흑인인 먼순부인에서 코엔형제식의 뒤틀기를 엿볼 수 있다. 미세스 먼순 자체만으로 해석한다면 남성인 5인조를 파멸로 이끄는 필름느와르 영화의 팜므파탈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필름 느와르의 여성처럼 마지막에 와서 가정이나 사랑에 의해 도덕적 선택을 하는 먼순부인의 마지막 결정 때문에). 코엔형제는 장르변주를 <레이디킬러>에서 꾀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에게 무언가 어긋나는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교묘한 뒤바꿈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이것은 어디까지 ‘코엔’이라는 이름이 제목 앞에 붙은 대서오는 강박증같은 영화해석일 뿐이다.
코엔형제는 끊임없는 변화를 꿈꾸는 족속임에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정형화된 ‘코엔다움’을 요구하고 그에 상응하지 않으면 실망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왠지 그들의 영화보다 더 부조리하지 않은지 되묻고 싶어진다. 코엔형제 영화를 직접 봐도 여태 그들을 잘 알지 못하는 필자 앞에서 ‘코엔다움’을 떠들어대는 당신에게 정중하게 또한 예의바르게 물어본다.
“대체 뉘들이 말하는 코엔다움은 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