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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풍의 추억 - '아라한 장풍대작전' 을 보고
이해경의 무비레터 | 2004년 6월 11일 금요일 | 이해경 이메일

※ <아라한 장풍 대작전>을 보고 쓰는 글이지만, 영화에 대한 얘기는 거의 없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컴퓨터가 없었습니다. 어딘가에 있기는 했겠지만, 제 눈에 안 띄었으니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당연히 인터넷도 없었고, 온라인 게임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것 말고도, 없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전화기를 들고 다니고, 그걸로 사진도 찍는 깜찍한 광경은 공상과학영화에도 나오지 않았을걸요.

그뿐이겠습니까. 놀이문화만 놓고 보아도 그때와 지금은 하늘과 땅 차이죠. '하늘과 땅 차이'라고 써놓고 보니, 그때는 정말 땅에서 놀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땅에 금을 긋고, 땅을 파고, 땅 위에 그림도 그려가면서…… 맨땅에 헤딩하는 것말고는 뭐든지 해도 괜찮았죠. 단순히 '노는 장소'에 그치지 않고, 땅은 놀이의 대상이자 도구, 어쩌면 함께 놀아주는 든든한 친구였습니다. 친구들은 엄마가 불러서 집으로 사라져도, 땅은 언제나 그 자리에 남아 있었죠.

얼마 전에, 제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차들에 가려 아이들의 상체만 보였죠. 뭘 하며 노는 걸까? 짐작이 안 되면서도, 엉거주춤 멈춰선 모습들이 왠지 친숙하게 다가오는 순간, 홀로 떨어져 있던 한 아이가 돌아서서 소리치고는 다시 고개를 홱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그런데 우르르 몰려오다 멈추는 아이들의 동작이 뭔가 이상했습니다. 저는 반가움 반 호기심 반으로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아이들의 발에는 인라인 스케이트가 신겨져 있었습니다. 미끄러지듯 굴러가다가…… 브레이크! 딱 어울리는 놀이 아니겠습니까.

차이가 뭘까요? 역시 하늘과 땅 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땅에서 5 센티미터만 떠도 하늘로 봐준다면 말입니다. 아무튼 땅은 아니니까요. 스케이트를 신은 아이들의 발은 허공에 떠 있는 겁니다. 스케이트 보드, 킥 보드, 그리고 힐리스 신발도 마찬가지죠. 공통점은 바퀴. 바퀴는 빠르고 위험합니다. 빠르니까 위험하고, 위험하지 않고는 빠를 수 없습니다.

땅을 떠나 점점 높이 올라갈수록, 더 빨라지고 더 위험해지고…… 더 재미있어진다고들 합니다.(저는 겁이 많아 그게 사실인지 확인해볼 엄두가 안 납니다.) 번지 점프와 자이드롭과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스카이 다이빙까지…… 사람들은 기를 쓰고 올라가서 목숨 걸고 떨어집니다. 돈도 안 받고. 오히려 돈을 내면서. 왜? 재미있으니까요. 아니, 재미있다고 하니까요.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재미있다고 하고 싶으니까요. 저처럼 그런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없는 이들은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마치 영화를 보며 잠시 멋진 주인공과 하나가 되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영화란 그런 겁니다. 대신 놀아주기. 대신 잘 놀아주면 구경하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아라한 장풍 대작전>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제가 어렸을 때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영화가 자꾸 옛날을 생각나게 하네요. 장풍 때문입니다. 장풍이란 뭔가요? 말 그대로 손바닥에서 나오는 바람. 그런 게 어디 있냐고요? 그런 것들만 모아놓고 보면, 옛날에는 없는 게 없었습니다. <철사장과 공수도>라는 영화도 있었는데,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뜨거운 모래에 손을 파묻고 견디는 수련을 쌓습니다.(<아라한 장풍 대작전>에도 잠깐 나오죠.) 마침내 손이 쇠보다 단단해진(철사장) 그는, 휙휙 날아다니는(공수도) 원수의 가슴팍에 열 손가락의 자국을 남깁니다.

장풍 얘기는 좀 뒤로 미루고, <철사장과 공수도>에 관해 할 얘기가 조금 더 있습니다. 제가 마치 그 영화를 본 것처럼 말했지만, 실은 그때 다니던 합기도장(합기도와 태권도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 그런 게 그 시절 아이들의 관심거리였습니다.)의 어떤 형에게 전해들은 얘깁니다. 그런데도 그 영화가 제 기억 속에 선명한 장면으로 남아있는 것은, 그 형의 얘기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듣는 저의 감명이 남달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누구 편이었을 것 같은가요? 철사장과 공수도 중에서 말입니다. 그런 물음을 던지는 데서 짐작들을 하겠지만, 저는 가슴에 열 개의 시커먼 멍을 남기고 죽어간 공수도 편이었습니다. 악당이지만 죽는 게 불쌍해서 그랬을까요? 글쎄요, 제가 악당을 사랑할 만큼 조숙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고……

이유는 단순합니다. 날아다니니까 그런 거죠. 뜨거운 모래에 손을 집어넣고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쪽보다는, 어떻게 수련을 쌓았는지는 몰라도(악당의 수련과정을 보여줄 만큼 여유만만한 영화는 드물죠.) 붕붕 날아다니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겁니다. 저만 그랬을까요? 저처럼 속으로는 왜 주인공이 공수도를 연마하지 않았을까 안타까워한 친구들이 둘에 하나는 되지 않았을까요? 나머지 반도 악당이 하늘을 나는 순간만큼은 경탄의 눈길을 보냈을 게 틀림없습니다. 땅에서 주로 놀았지만 땅만 보며 산 것은 아니었다 이거지요.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인간의 오랜 꿈은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비행기는 인간을 돕는 기계일 뿐, 맨몸으로 날아보는 것이 그 꿈의 진정한 내용일 테니까요. 새처럼 나는 시도는 이제 포기된 듯합니다. 단 몇 초 동안만이라도 좋으니 공중에 떠 있어 보는 것. 중요한 것은 그런 뒤에 땅에 내려앉아도 사지가 멀쩡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어렸을 때 가슴 아팠던 기억이 하나 떠오르네요. 부잣집은 기와를 얹은 지붕 대신 슬라브 옥상이 유행할 무렵이었습니다. 친구 집 옥상에 전봇대가 하나 붙어 있었고, 우리는 그 전봇대를 타고 내려가는 놀이를 즐겼습니다. 어느 날 저는 능숙한 솜씨를 뽐낸다고 까불다가 전봇대를 안은 팔을 너무 느슨하게 풀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떨어졌는지 기억도 안 나요. 한 3미터나 됐을까요. 그 높이가 엄청난 허공으로 느껴졌던 것 같고, 다음 순간 땅바닥에 몸이 부딪쳤는데…… 숨이 탁 막히며 가슴을 압박하는 통증! 엄살이 아니라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아픔보다는 창피함이 더 커서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일어날 수 있었지만, 50센티미터만 더 높은 데서 떨어졌어도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 꿈의 실현에 가장 근접한 것은 스키의 '점프' 종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키에 의지하므로 맨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낙하산이나 밧줄과는 확실히 다르죠. 무엇보다도 수직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포물선을 그린다는 점이 그럴 듯하잖아요? 비스듬히 날아올랐다가 차츰차츰 떨어져서는 미끄러지며 내려앉는다는 것. 그래야 안 다친다니까요. 하지만 역시 쉽지가 않은 겁니다. 스키 인구는 놀랄 만큼 늘었어도 아무나 점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스키장이 있는 줄도 몰랐고 비행기 타는 것도 꿈꾸기 쉽지 않던 시절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장풍입니다. 장풍을 아무나 할 수 있었다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반응이 눈에 선하군요.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장풍을 쏘고 놀았어요. 실내와 야외를 가리지도 않았죠. 하지만 그래도 장풍을 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역시 교실 뒤의 빈 공간이었습니다. 집에서 하면 이불을 깔아놓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좁은 게 흠이었고, 운동장이나 공터는 장풍의 강도를 맘껏 높일 수 있어서 좋았지만 넘어질 때 옷에 흙이 묻는다는 게 탈이었죠. 그리고 대개는 다른 무술 대결을 벌이다가 장풍 대결로 넘어가곤 했기 때문에, 빗자루와 봉걸레를 비롯한 각종 무기들이 즐비한 교실 뒤야말로 '장풍 대작전'을 위해 준비된 공간이었습니다.

고도로 훈련된 판토마임 배우의 연기를 본 적이 있나요? 없는 벽을 더듬고, 보이지 않는 줄을 잡아당기고…… 그 옛날 장풍을 주고받던 우리들의 실력도 그에 못지 않게 수준급이었다고 자부합니다. 먼저 정신을 집중하고, 두 손을 끌어올려 내공을 가슴께에 모은다, 빛나는 눈빛, 기합 소리와 함께…… 그 다음은 뭐 뻔하지 않겠습니까. 오른손잡이는 오른손바닥으로, 저 같은 왼손잡이는 왼손바닥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폼입니다. 폼이 얼마나 근사하냐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니까요. 더 자세히 말하면, 폼이 좋을수록 장풍을 맞는 상대가 멀리 날아갔고, 그 거리에 따라 서열은 매겨졌던 겁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었어요. 그것도 역시 폼인데, 장풍을 맞는 쪽의 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절 우리들의 장풍 놀이에서 최고의 스타는, 장풍을 가장 폼나게 쏘는 녀석이 아니라, 가장 폼나게 맞고 나가떨어지는 녀석이었다 이겁니다. 그 기막히게 절묘한 타이밍! 어떤 친구는 정말 고수여서, 제 손바닥에서 진짜 어마어마한 바람이 불어나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

모든 놀이를 거의 맨몸으로 때우던 그 시절,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장풍이 몰고 온 유행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게 다 어디서 왔겠어요? 동네 극장에서 동시상영으로 틀어줬던 온갖 영화들. 영화란 그런 거 아닌가요? 영화를 보며 놀고, 영화를 본 뒤에 또 영화처럼 놀고…… <아라한 장풍 대작전>을 보러 많은 중고생들이 왔던데, 과연 그들이 학교로 돌아가서 장풍을 쏘며 놀까요? 글쎄요,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저는 그저 이 영화가 좀 심심하다고 느끼며 아련한 '장풍의 추억'에 젖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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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27
qsay11tem
무술만 볼만한 영화   
2007-11-27 12:53
kpop20
궁금한 영화   
2007-05-18 22:51
sweetybug
진짜 장풍이 가능할까요??   
2005-02-13 16:38
imgold
장풍~ 정말 꿈의 기술이죠..ㅎㅎ   
2005-02-0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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