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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뒤죽박죽 해놓았지만 이야기는 절묘하게 맞아들어 간다. 거기다 자신이 영화를 올매나 많이 봤는지(사실 쿠엔티만큼 영화를 많이 본 사람도 거이 없다. 인정!) 쭉 나열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는 감독이 어디서 어떻게 우리의 옛 영화에 대한 추억을 건들려 주는지 스크린을 향해 눈을 부릅떠야 하고 또한 브라이드의 독기 어린 독설과 복수의 진행과정도 빠짐없이 체크해야 한다. 이렇게 영화 보면서 바쁘기도 첨이지만 관객을 한시도 가만히 못 내버려두는 악취미의 감독도 솔직히 만나보기 힘들다.
<킬빌 vol.1>을 보면서 쿠엔티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엄청난 대사로 고통(?)에 가까운 즐거움을 주던 그가 이제는 한조의 검에 단지 붉은 핏자국만 찍어내니 언어의 유희에서 몸의 유희로 전향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잠시 이번 영화만 다르게 찍었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킬빌 vol.1>은 <킬빌 vol.2>를 위한 쿠엔티의 장난스러운 서비스였음을 곧 깨닫게된다. 돌아온 브라이드는 첫 장면부터 자신의 복수를 해야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쏟아내고 몸으로 연기하던 배우들은 이젠 자신들이 얼마큼 잘나고 잔인한지 입담으로 증명한다.
QT의 영화들이 그랬듯이 <킬빌 vol.2>는 수다로 폭력을 휘두르고 극을 완성해 나간다.
여기서 <킬빌 vol.2>가 <킬빌 vol.1>과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하나의 완결된 영화라는 전제조건이 생겨난다.(반대로 <킬빌 vol.1>은 쿠엔티 타란티노의 영화 중 이례적인 작품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전편이 사무라이로 상징되는 검의 영화였다면 <킬빌 vol.2>는 스파게티 웨스턴 분위기에, 쿵푸 영화들의 촌스럽기 그지없는 카메라 효과가 더해진, 권법 영화로 짜여져 독특한 스타일을 자랑한다. 또한 1편에서는 브라이드의 본명을 장난처럼 효과음 처리하여 그녀의 정체성에 대해 뚜렷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다면 2편에서는 그녀의 본명(키도 베아트릭스)을 부름으로써 복수의 당위성과 역동적 움직임을 행하는 인물의 시퀸스에 공허함을 배제시켰다고 볼 수 있다.
허나, <킬빌 vol.2>의 결말은 잔혹한 복수의 이행과정에 비해 맥이 빠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데들리 바이퍼’의 보스이자 브라이드 딸의 아버지인 빌의 죽음은 1편까지 합친 런닝타임에 반해 너무 싱겁게 끝나고 “암사자는 새끼를 찾았고 정글은 평화를 얻는다”로 모든 상황을 종료하는 감독의 권위는 들뜬 감정으로 영화를 본 관객의 마음을 조롱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아! 감독이 천하의 영화 악동이었지?!”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려고 해도 그의 영화 스타일에, 억지로든 자발적으로든, 맞추면서 같이 놀아보자고 날뛰었던 행동들이 뻘쭘한 ‘동작 그만!’ 자세로 남아버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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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브라이드의 독기 어린 눈은 정교하게 인물들의 동선에 1편과는 다른 목표를 부여한다. 오직 ‘복수’만 하면 되는 그녀의 목표에 현란한 복수의 이행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린 그녀가 복수를 완성했는가 에서 오는 표면적 쾌락만 추구하면 되는 것이다. 때문에 <킬빌 vol.2>의 심플한 결말은 복수의 궁극적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감독의 악취미는 아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몸으로 말하던 인물들이 이제는 복수를 입으로 행할 뿐 즐거움은 늘어난 런닝타임만큼 늘면 늘었지 감소하지는 않았다.
‘오직 즐겨라!’, 이 암묵적인 구호 아래 영화의 미학을 따지고 오마쥬 영화들에 대한 새로운 작가적 해석을 논의하는 것은 감독의 의도를 배반하는 일이다. 쿠엔티 타란티노는 자신이 좋아하던 영화 장면들을 자기 영화에 삽입했을 뿐 어떠한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쿠엔티 감독과 우만 서먼은 그저 카메라의 앞과 뒤에서 “열광? 필요 없어!, 오직 몸의 언어와 입술의 수다 안에서 즐기기만 해”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린 왜 이렇게 오락영화 <킬빌> 시리즈 앞에서 무엇에 그리 열광했을까? 영화가 궁금한 게 아니라 우리들의 어떤 허위의식에서 ‘열광’이 나왔는지, 사실 필자는 이게 더 궁금하다.
그저 영화광임을 자랑하고 싶은 어린애 같은 감독의 호들갑에 진지하게 질문하고 답을 요구하는 우리의 행동이 이제 와서 보니 좀 우스워 보일 뿐이다.(파이 메이가 광동어 못한다고 브라이드를 혼내는데 그녀는 일본어는 한다고 대답하던 그 우매한 상황과 똑같다)
돌려 말하자면, 파이 메이가 “난 일본 싫어”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왜 싫어?”라고 반문하는 꼴이다. 아무 의미 없이 즐기라고 만든 영화를 가지고 요란하게 따지고 있는 우리들의 태도를, 감독 QT는 살짝 영화 안에서 이런 식으로 비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서 어떤 영화를 오마쥬 했는가를 따지기에 앞서 쿠엔티 타란티노 식의 조롱도 먼저 눈치 채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