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쯤 전의 기억이지요. 그 후로도 TV에서 여러 차례 봤을 텐데, <벤허>의 장면들을 떠올리려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상하게도 그 옛날의 기억 창고 속에 저장된 장면들뿐입니다. 어린 시절 극장의 어둠 속에서 어른들 틈에 섞여 눈에 담았던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의 향연……
예수가 나오는 장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구요. <벤허> 얘기를 좀더 하자면, 저에게는 그 유명한 마차 경주보다도 더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경주가 끝난 뒤에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패자의 참혹한 모습인데요. 제가 진짜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장면에서 스크린 오른쪽 귀퉁이에 세로로 떠 있던 자막 속의 한 단어입니다. 상처가 치명적이야…… 혹은, 치명적인 부상이군…… 뭐 그런 내용의 대사였는데, 그 ‘치명적’이라는 표현이 어린 저에게 그야말로 치명적으로 다가왔다고 말하면 뭔가 느낌이 전달되나요? 그땐 모르는 단어였죠. 몰랐는데 듣자마자, 아니 보자마자 알겠더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말뜻을 안 것은 아니었구요. 그냥 ‘목숨을 건드리는’ 느낌만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철없는 아이의 의식을 강타했던 겁니다. 치명적으로……
목숨을 건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흘린 피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물론 반대쪽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죠. 진실이 밝혀지게 되면 최소한 패가망신할 무리들 말입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무서운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가진 게 많으면 몸이 무거워서 ‘시대’라는 이름의 트랙을 도는 ‘치명적인’ 레이스에서 자꾸만 뒤처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머지 않아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할 날이 올 겁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만 목숨 거는 자들의 한계지요.
그래서 문제는 커밍아웃입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저에게 남긴 화두도 바로 그것입니다만, 영화 얘기는 또 좀 뒤로 미루기로 하구요.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아무나 목숨을 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아야 꼭 좋은 것도 아니구요. 저는 대개의 경우 엘리트주의를 경계하는 편이지만, 목숨 걸고 앞장서고 하는 것은 감당할 만한 소수가 따로 있다고 봅니다. 특별히 잘나서가 아니라 특별히 팔자가 세서 그러는 거라고 해두지요. 그러니까 저를 포함한 나머지 다수는 맘 편하게 먹어도 되요. 대신 우리가 할 몫을 하면 된다구요. 그게 커밍아웃이라고 말하면 감이 좀 잡히나요? 이제부터 영화의 도움을 받아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같은 유형의 영화는 사전에 관객마다 관람 태도를 뚜렷이 정하고 들어올 것을 요구합니다. 그걸 모르거나 우습게 알고 들어갔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별로 유쾌하지도 유익하지도 못한 경험을 하고 나오기 쉽습니다. 이를테면 너무나 고통스러워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봐야 할 것을 못 보게 된다거나, 혹은 지루하기 짝이 없어 팔짱 끼고 하품만 함으로써 귀한 시간과 돈을 들인 스스로의 선택을 한심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거나…… 저는 두 가지 태도를 정하고 들어갔습니다. 첫째, 영화 보는 동안 나는 잠시 크리스천이 아니다. 둘째, 영화 보는 동안 나는 잠시 대통령 탄핵을 잊는다. 어떤 심사가 느껴집니까? 자신의 두 가지 정체성을 잠시 부정함으로써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해보겠다는 나름의 술수라 할 만합니까?
하지만 미리 관람 태도를 정하네 어쩌네 호들갑을 떨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렇게 꼭꼭 숨어있으라 해도 말을 안 듣고 고개를 내민 저의 신앙적 심성과 정치적 입장이기에 대견하고 믿을 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뿌듯함 때문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만 말하고 말겠습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조심스럽게 투영된 저의 신앙심과 정치 의식의 접점에서 ‘커밍아웃’이라는 테마는 ‘나온다’는 것입니다.
<벤허>의 예수가 어린 저에게 준 강렬한 느낌은 한마디로 압도당하는 기분을 말합니다. 어려서 더했을 거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린데도 느낄 정도였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두 예외가 있긴 했지만, 지금껏 예수가 나오는 대부분의 영화는 그랬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확실히 다릅니다. 그런데 뭐가 다르다는 거지요? 예수의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매질을 보여준다? 십자가를 뒤집어서 예수의 손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못을 구부리는 장면도 있다? 그런 장면들에서 예수는 고통스러워할지언정 의연한 모습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신이자 인간인 그가 좀더 인간으로 부각될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인상적으로 본 예수의 모습이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쇠사슬에 묶여 끌려다니는 그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뒤뚱대잖아요. 그 장면이 없었다면 아마도 저는 독하게 마음 먹고 거리 두기에 성공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제 마음은 더 견디지 못하고 측은함으로 무너져 내린 거예요. 인간인 제가 구세주로 믿는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는 것. 아무래도 이거 굉장한 천기를 누설한 듯……
예수는 끊임없이 커밍아웃한다는 거지요. 겟세마네에서, 제사장들 앞에서, 빌라도야 손을 씻든 말든, 때가 되자 자신이 누구인지 숨기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것을 빌미로 당할 고초가 얼마나 극악할지 뻔히 알고도 그럽니다. 모르면 몰라도 알고 그럴 수 있나요? 예수의 커밍아웃은 목숨을 내던지는 자기 선언이었습니다. 따라할 수 있겠어요?
따라하지 않아도 됩니다. 베드로도 못한 일인걸요. 사도 요한도, 마리아라는 이름의 두 여인도, 끝까지 예수의 곁을 지켰을 뿐 사랑하는 그이를 그 자리에서 따라가지는 못했습니다. 남은 이들에게는 남은 이들의 몫이 남아 있는 거지요. 그러므로 저를 포함해서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커밍아웃이란…… 뭐라고 설명할 게 아니라 모델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복음서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일컫는 한 남자가 나옵니다. 지친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사내.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지요. 억세게 재수없는 날이라고 투덜대며 마지못해 십자가를 대신 졌겠죠. 하지만 나중에 어쩌나요. 보자보자하니까 이것들이 너무하잖아…… 그런 마음을 숨기지 않는 작은 용기를 발휘해서, 예수를 괴롭히는 군사들을 저지하는군요. 그 정도 커밍아웃으로는 아무 탈도 없잖아요. 그러니 안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자구요. 앞으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 쭈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