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설치하고 있는 분리장벽(separation wall)을 비롯하여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책 등은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 그에 따른 인종정책의 추한 흔적을 보여준다. 이것은 전적으로 20세기의 쓰레기이다. 만약 분리장벽의 흔적이 수십년 후에도 남아있다면, 이스라엘의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차별과 분리의 수단으로 종종 선택되는 것이 장벽을 세우는 일이다. 철조망이든, 높은 콘크리트 담벼락이든, 어쨌든 억압하는 자들이 세우는 장벽은 여기로 들어오지 말라며 박해받는 자들의 가슴속에 또 다른 장벽을 세운다.
영화 <토끼 울타리>에서 토끼 울타리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원래 호주의 토끼 울타리는 토끼의 과도한 번식에 따른 농작물 피해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지만, 영화 안에서는 원주민들을 격리하고 구별지으며 끝내는 백인종에 동화시키고 말겠다는 인종말살 정책의 상징처럼 보인다. 높이 나는 하늘의 새가 자신을 지켜줄 거라 믿는 원주민들의 삶은 대륙을 쪼갠 토끼 울타리에 걸려 자유로이 오가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그러나 이 울타리는 백인들의 원주민 혼혈아 수용소에서 탈출한 몰리 자매에게 그들의 고향을 알려줄 유일한 이정표가 된다.
호주 정부는 1970년대까지 원주민 거주지에 사는 혼혈아들을 부모에게서 강제로 빼앗아 수용소에 방치하는 정책을 실시해왔는데, 여기에는 백인들의 혈통을 혼혈아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입시켜 원주민 혈통을 지우려는 인종주의적 발상이 숨어있다. 수용된 아이들은 자신들의 말과 습관 대신 백인의 것을 받아들이길 강요당하며, 성장한 뒤에는 백인 사회의 하층민으로 편입된다.
<토끼 울타리>는 1931년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원주민인 지갈롱족 어머니를 둔 14살짜리 혼혈아 몰리는 동생 데이지, 사촌 그레이시와 함께 백인 경찰에게 잡혀 집에서 2000Km 넘게 떨어진 수용소로 끌려간다. 영국의 국민 배우 케네스 브래너가 연기하는 혼혈 원주민 담당관리 네빌은 사회적 다윈주의(진화론을 사회현상에 적용하여 인종차별을 정당화시킨 이론. 열등한 종족과 우수한 종족이 있으며 열등한 종족은 도태되어야 한다는 주장)와 인종주의의 화신같은 존재로, 원주민 혈통을 말살하는 것이 결국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몰리 자매를 붙잡아 올 것을 지시한 인물이 바로 네빌이다.
어린 아이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먼 길과 무더운 날씨, 추적자들에게 맞서 몰리와 그레이시, 데이지는 쉴 새 없이 걷고, 숨고, 또 걷는다. 아, 그런데, 수천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걸으며 고난과 피로에 가득 차 있어야 할 몰리의 얼굴이 어느새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진짜 아름다움이란 시련에 맞서는 굳센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인가? 이 숭고한 아름다움을 보는 것만으로도 비디오를 찾는 수고가 보상받을 것임을, 그리고 어떤 과장도 없는 이 영화에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감동받게 될 것임을 믿는다.
몰리와 그 동생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자신이 하는 일이 원주민을 위한 것이었음을 그들이 알아주길 바란다는 네빌의 말에서 드러나는 백인들의 자기기만과 인종주의적 신념은 세월이 흘러도 버티고 앉아 끊임없는 비극을 부른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호주 인종정책의 희생자인 이들 원주민 혼혈아 세대는 Stolen Generation이라 불리며, 전체 호주 인구의 2%를 차지하는 원주민들은 1967년까지 인구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호주 정치권 내에서 원주민들에 대한 사과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영화 중반부에 몰리와 그 동생들은 메이비스라는 이름의 흑인 하녀를 만난다. 그녀 역시 수용소 출신으로, 낮에는 일, 밤에는 자신을 성적으로 희롱하는 백인 남자의 손길에 시달린다. 백인 남자와의 잠자리를 피하기 위해 메이비스는 아이들을 곁에 붙잡아두려 한다. 아마 몰리는 그녀에게서 자신과 동생들의 미래를 보았을 것인데, 결국 이런 운명이 백인들이 약속한 미래였으며 식민정책이 펼쳐지던 당시 제 3세계 어디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래의 <토끼 울타리> 관객들께 부탁드린다. 주인공들의 뒷이야기가 있으니 영화를 끝까지 봐줄 것. 그리고 자유의 소중함, 인간의 숭고함에 대한 감동을 맛보는 것을 넘어 당시의 정치, 사회적 현실과 아울러 과거와 현재 우리의 모습까지 생각해주시길. 개인적으로 <토끼 울타리>관람은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귀한 체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