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이라 부르든 유서라 부르든 그는 지금까지 길 위에 뿌리며 달려온 자기 삶을 생각하며 한 줌의 생각을 떠올린다. 바로 이거다. ‘아일리나 사촌을 팬 뒤로 나는 후환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올 줄 몰랐다. 번개처럼…전에도 말했듯이 이 동네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 줄 아무도 모른다…언젠가 할아버지가 내게 삶에 관심을 갖냐고 물었었다. 그렇다.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이건 앨런 휴즈와 알버트 휴즈 형제가 연출한 <사회에의 위협>(Menace II Society)의 마지막 장면이다. 아무런 업적도 유산도 남기지 않는 죽음. 다만 고통스런 자취만을 남기는 죽음. 그러한 죽음을 <사회에의 위협>은 심장 박동 소리와 남자 주인공의 마지막 단상을 절묘하게 배합시키며, ‘파국’에 대한 씁쓸한 페이소스를 유발시키고 있다. 이런 제길, 눈물이 흐른다.
흑인 운전사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경관들에 대해, 백인 일색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무죄 평결을 내린다. 이를 계기로 흑인들이 크게 분노하면서 촉발된 1992년 4월 29일 LA폭동사건. 아마도 모두 기억하실거다. 더불어 애꿎은 우리나라 교포들이 엄청난 재산 피해와 적잖은 인명 피해를 당했던 것 또한, 더욱 뚜렷하게 떠오를지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 역사에선, 이보다 더 강렬한 흑인들의 폭력 시위가 있었다. 바로 빈민가로 알려진 와츠 지역에서 발생한 1965년 ‘와츠폭동’. 미국 언론이 ‘한여름밤의 폭발’로 묘사한 이 와츠폭동 또한 인종차별에 분노한 흑인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방화, 약탈, 살인 등의 형태로 일파만파 번져갔다. 시카고와 앨라배마 등 미국 15개 도시에서 흑인들의 동조시위도 잇따라 일어났고, 천여명의 주방위군과 경찰이 동원돼 폭동 진압작전을 벌였다.
<사회에의 위협>의 배경은 시계 태엽을 1990년대초로 돌린, 이 악명높은 ‘와츠’다. 미국 서부에서 가장 많은 흑인들이 살고 있으며, 밝은 미래따윈 없이 위안없는 생이 만연한 이곳에서, 남자 주인공 ‘케인(타이린 터너)’이 태어난다. 케인의 부모는 와츠의 빈민가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흑인들이 그러하듯, 마약딜러이며 상습적인 마약중독자다. 와츠에선 법은 그저 허수아비격. 흑인들은 시비가 붙으면 자연스레 총을 집어들고, 서로의 몸을 걸레짝처럼 난사하며 자신들만의 ‘인과응보’를 반복한다.
케인의 아버지가 맞은 죽음도 그렇게 허무한 죽음. 그런 암담한 현실에서, 케인은 일상적인 폭력을 무의식중에 내재화하며 성장한다.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할 만한 일도 딱히 없다. 그러던 중, 케인은 거리에서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게 되고, 함께 차를 타고 가던 그의 사촌은 즉사한다. 이에 케인은 경찰이 대신해 주지도 않을, 그만의 복수를 실행한다. 역시 총으로 범인들을 난사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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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희망은 없을까. <사회에의 위협>에서 케인은 그의 연상의 연인 ‘로니’에게 이렇게 내뱉는다. ‘다른 곳으로 가도 미국이긴 마찬가지’며, ‘우리가 흑인이란 사실도 변함없다’고. 하지만 다른 곳으로 떠나자는 로니의 말에 그렇게 냉소적으로 대꾸하면서도, 케인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게 된다. 별다른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희망을 지니게 된 것. 앞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던 건, 이러한 케인의 내면을 무참하게 조롱하는 서글픈 결말 때문이다. 와츠를 떠나려는 찰나, 원한을 품은 흑인에게 케인이 죽음을 당하니 말이다.
<사회에의 위협>이 만들어진 게 1993년이니, 지금은 뭔가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지난 시절의 기록이 될만큼 정말 달라졌을까. 아무리 주의깊게 들여다봐도, 역시 ‘이방인’의 시각이 개입될 수 밖에 없지만, 자신이 자라온 익숙한 세계, 그 범죄와 원한의 악순환에서 선뜻 빠져나오지 못한 채 끝없이 비틀거리는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처럼 느껴진다.
정도와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계도 무수한 차별과 폭력, 또 절망과 불안이 넘쳐흐른다. 아니, 내겐 그렇다. 그래서 우연히 다시 꺼내본 이 영화는 QD Ⅲ의 음악과 함께 다시금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