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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전주국제 영화제에서 심야상영 되었던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들은 당연하게도 폭력 삼부작으로 기억되었고 가히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악몽같은 폭력에 관한 밤의 향연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하네케의 초기 작품 경향은 오즈 야스지로에 버금가는 스트레이트 컷이었지만 그 형식에 담긴 내용은 오즈와 대척점에 서 있는 폭력적 상황 그 자체에 대한 가차없는 폭로전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폭력의 향연에 스며들어 있는 슬픔과 연민 또한 확실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 본 후에 느끼게 되는 역설적 창조의 순간이기도 하다.
미카엘 하네케는 첫장편을 그의 나이 45세에 찍었다. 그 전에는 주로 TV작업을 했으며 97년 <퍼니게임>으로 처음으로 칸 영화제에 자신의 영화를 출품하였다. 작년에 처음으로 하네케의 영화들을 보았을 때 너무나도 뚜렷이 겹쳐지는 동시대의 또 하나의 감독은 바로 전해 전주 국제 영화제 불면의 밤에서 상영된,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울리히 사이들의 영화들이었다.
오스트리아하면 짤츠부르크의 그림같은 풍경을 연상시켰었는데 이 두 감독들의 영화를 본 후로는 오스트리아의 자연보다는 도시의 일상인들에 관해 그리고 그들이 처한 상황들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영화들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파시즘의 공포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개 같은 날> 같은 영화는 마치 하네케의 영화에 유머를 가미한 듯한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꼬치꼬치 캐묻는 약간 맛 간 듯 보이는 여자와 자동차를 같이 타고 가는 느낌이 어떨지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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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로움의 원천은 두 번의 목격이 모두 원초적인 죽음에의 공포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죄지은 자들이 별다른 죄책감을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더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주관적 감정이입의 최소화는 관객들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도록 강요된다는 점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퍼니게임>의 경우에서와 같이 평온을 뒷받침하는 생활의 기반들이 갑자기 침입한 괴한들에게서 한꺼번에 참혹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도하면서 극도의 심리적 불안을 조장한다.
임박한 폭력이 곧 극대화 될 것 같은 현장, 그것은 곧 이성의 마비이며 파시즘이자 나아가 홀로코스트이다. 그것은 합리적 이성에 의한 대화가 도저히 불가능한 궁극적 악을 맞닥뜨렸을 때 겪게 되는 절망적 장면들의 모습이며 결국 안온한 부르주아적 가정의 파괴로 귀결된다. 그런데 그 불안의 원천인 궁극적 악이 만약 스스로에게서 기원한다면...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익숙한 명제는 여지없이 이 악몽 같은 현실이 ‘실재 그 자체’라고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하네케가 선사하는 비극의 요체일 것이다.
두 번째로 빈번하게 폭력과 융합되는 미디어의 돌출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과 같이 이미 고전 반열에 오른 영화들에서부터 구스 반 산트의 <투 다이 포>, 샘 멘더스의 <아메리칸 뷰티> 그리고 작년 깐느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엘리펀트>까지 말이다. <올드보이>에서였던가? TV는 우리 시대의 연인이며 종교이며 친구이자 선생님이라고... 그런데 하네케가 등장시키는 TV의 기능은 좀 더 복잡하다. 우선 하네케의 카메라와 재생되는 비디오의 시선 분열을 통해 다층화된 이미지에 관한 사유를 시도하며 그 형식은 롱 테이크로 지속되는 시간을 통해 현실인상을 강하게 남기는 리얼리티를 만들어 낸다.
<퍼니게임>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면 그가 제시하는 날 선 이미지들이 단순한 폭로나 충격에 그치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는 아마도 점점 충격적인 장면들에 익숙해져 가는 현대 tv와 영화의 이미지를 수용하는 관객의 촉수에 전기 충격이라도 가하려는 듯 보인다. 이상한 것은 이미지로 변환된 그 전기적 충격들이 다시금 새로운 감각을 회복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더 큰 충격을 통해 이전의 잊혀졌던 감각들을 생각해보게 한다는 것. 참 이상한 역설의 작가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조직하는 충격적인 살인의 장면들은 항상 분열된 주체의 시각체제를 카메라라는 또 하나의 시각체제에 의해 드러낸다. 다시 보기의 경험들, 하네케는 플래시 백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인터뷰에서 말한바 있다. 그런데 그의 영화는 다시 반복해서 되돌아가는 장면들이 항상 다시 등장하는데 그 장면에 이르러서야 이제 영화는 여기가 시작이자 끝이지만 그것은 사실 우리가 사는 삶 그 자체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렇게 끝난다. ‘트라우마는 일상적 시간과 사건을 분리시키지만 그 자체로서는 판타지일 뿐’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가 시각의 분열을 조직하는 방식은 우리가 보게 되는 스크린에 대한 시선과 그것을 굴절시키는 TV 화면에 대한 시선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서 우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완벽히 이야기와 부합되는 분열상의 완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TV를 보는 눈과 스크린을 보는 눈은 이야기 구성 상 서로 다른 주체를 상정하고 그 이야기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이끌어가고 동시에 그 시선들을 파편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파편화된 시선들은 주로 비스듬히 그리고 때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머물도록 한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반복된 이미지의 재생을 관람!하면서 점점 서로 다른 주체를 상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2개의 단편들>은 그의 영화적 지향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가를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자동차 도로를 주행하는 듯한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곧 이어 뉴스장면으로 연결되고 뉴스를 보던 이는 또 다른 사건들로 연결되고 그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쇄를 따라가는 방식인 것이다. 어찌보면 마치 로버트 알트만의 스타일을 극단화 시킨 듯한 느낌이 드는 이 영화는 단편들이라는 말처럼 씬들이 검은 화면으로 단락지어져 있다. 72개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72개의 장면들이 모자이크처럼 하나의 거대한 사회를 보여준다고 상상해보라. 스토리는 사라지고 단지 알레고리만 남을 뿐이며 그 사건들의 인과적인 기록은 영화의 한계에 다다른다. 이것은 물론 파시즘을 가리키며 인과율에서 저 멀리 벗어난 삶 속에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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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을 조직하는 공간의 구성법은 역시나 감정적 불순물이 걸러진 잔혹한 의지로 가득한 고정된 롱쇼트로 기록되어 있다. 더군다나 이중의 액자틀 형식으로 분할된 프레임과 그 프레임 속의 TV화면은 한 소녀의 죽음을, 베니가 저지른 살인을 조금 전과는 다른 각도로 비춘다. 돌이킬 수 없는 객관적 살인행위를 관객과 살인공모자가 될 한 가족이 다 함께 검증하는 현장이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미디어와 결합된 살인의 순간들을 이미 여러번 경험한 바 있다. 매일 매일 중계 보고되는 살인사건의 뉴스릴들을 비롯해 그런 사건들을 일회적 잔혹함으로 극화시킨 영화들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TV 속 뉴스 릴 필름이 실제 뉴스를 따온 것인가 아닌가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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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녀의 욕망을 알지 못한다. 단지 피학적 사랑에 목말라하고 폭력에 노출되기를 원할 뿐이다. 영화는 매우 평온한 일상 속에 하얀 날을 번뜩이는 비수처럼 광기의 단면을 드러낸다. 그 광기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중독현상과 금단현상에 대한 것이다. 자신을 쫓아다니는 젊은 남자에게 사랑을 주지 않음으로써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에리카는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폭력적으로 지배당한다.
그 폭력은 그녀를 깨우고 그녀의 육체를 현실 속에서 다시 발견하게 한다. 그녀에게 고착된 피학증은 슈베르트 피아노의 소나타의 선율만큼이나 처연하며 우리는 언어를 잃어버린 거대한 바벨탑의 신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좀처럼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녀가 빠져버린 중독의 늪은 기실 피아노 혹은 피학적 사랑에의 욕구라기 보다는, 사랑을 잃어버린 그 상태 그러니까 어찌할 수 없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일지도 모른다.
아직 <성>(‘97), <미지의 코드>(‘00) 그리고 최근작인 <늑대의 시간>(‘03)과 을 보지 못했지만 듣자하니 <퍼니게임>의 연장선상에서 감독은 여전히 같은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듯 하다. 내 속에서 나온 ‘나’는 ‘우리’에게 얼마나 추악한가라고...
p.s. 참고로 이 말은 지젝을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의 상투어이기도 하다. 내 속에서 나온 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