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맥 밥(맷 데이먼)과 플레이보이 월트(그렉 키니어) 형제는 서로 다른 외모와 더 판이한 성격에도 불구, 어딜 가나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그건 두 사람이 옆구리께가 붙은 채 태어난 샴쌍둥이기 때문.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라는 문구는 어쩌면 이들을 위한 거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 샴쌍둥이라는 '장애'는 둘에게 핸디캡이 되지 못한다. 형제는 그들만의 강점을 살려 3분 이상 기다리면 무조건 공짜라는 파격적인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퀴키버거'의 주인으로, 난공불락의 골키퍼로 활약을 펼치며 작은 마을 바인야드의 스타로 떠오른다.
한편 아픔도 없지는 않다. 마을에서 배우로 날리는 월트가 무대에 설 때마다 무대 공포증인 밥은 애꿎은 호흡곤란을 겪으며 비오듯 땀을 흘려야 하고, 플레이보이 월트가 섹스를 하는 동안 밥은 몸이 격렬히 흔들리는(?) 가운데 통신에서 사귄 여자친구에게 이메일을 쓴다. 한편 공유하고 있는 간이 거의 밥 쪽으로 가있는 탓에 월트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빨리 늙는다. 분리수술을 하지 못하는 것도 월트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탓이다. 어느 날 월트는 더 늦기 전에 헐리우드에 가서 배우로 성공하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순진남 밥이 쭈뼛대면서도 덩달아 헐리우드행 짐을 꾸리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 그리하여 캘리포니아의 작렬하는 태양 아래 선 옆구리 붙은 시골형제들은 이전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쇼비지니스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화장실 유머의 대가 패럴리 형제를 이야기하며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의외로 '정치적 공정함(political correctness)'의 개념이다. <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의 정신분열,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의 비만여성, <킹 핀>의 한 쪽 손이 의수인 볼링선수, 그리고 <덤 앤 더머>의 두 바보들까지 장애 혹은 치명적 결점을 지닌 존재들은 패럴리 형제의 영화에서 보기 낯선 것이 아니다. 결점을 보듬어주기는커녕 겉으로 드러내 노골적으로 희화화하는 이들의 화법은 우스운 반면 불편하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불편함이 무념(無念)에서 오는 게 아니라 "위선은 저질 농담보다 나쁘다"는 나름의 확고한 철학에서 비롯한다는 점.
이런 식의 깡다구는 특히 패럴리 형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시원스런 카타르시스로 작용해왔던 터라, "못생겨도 마음만 예쁘면..."이라는 이들답지 않은 '교훈'으로 마무리한 전작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는 오히려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얻어내기도 했다. 이리하여 좀더 착해진 악취미 형제들의 눈길은 <붙어야 산다>에 와서 샴쌍둥이라는 좀더 '본격적인' 소재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 주류영화로의 달갑잖은 편입이건, 혹은 무조건적인 비아냥에서 벗어나 이룩한 한 단계의 진화이든 패럴리 형제가 결점이 있는 존재들을 보듬기 시작한 것은 하나의 분명한 징후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의 연장선상에 있기도 한 이 샴쌍둥이 코미디에는 그러나 좀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요약해 말해 <붙어야 산다>는 절절한 드라마와 경박한 코미디가 결합한 초유의 이종교배 같은 영화기 때문이다.
패럴리들다운 요란하고 경박한 탐색 앞에 '정치적 공정함'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철퇴를 맞는다. 예컨대 이런 부분. 장애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 앞에 설 수 없어 괴로워하는 밥에게 월트는 위로를 건넨다. "어디서 너 같은 남잘 만나겠어." 대뜸 이어지는 밥의 응수는 이런 것이다. "글쎄. 체르노빌(물론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의미한다)?" 한편 밥이 자신과 몸이 붙어있는 쌍둥이형의 존재에 대해(혹은 스스로의 장애에 대해) 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월트는 다그친다. "내가 부끄러운 거야?" 서로 다른 사람이면서 한 몸을 지닌 형제의 대화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자문자답으로도 치환될 수 있다. 난 장애를 가진 내가 부끄러운가? 관객은 "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대답을 하나의 분명한 문장 대신 함께 있어 행복한 그들의 모습에서 찾는다.
물론 <붙어야 산다>의 진짜 정체는 포복절도할 코미디다. 실제 셰어의 모습과의 불분명한 경계 속에 성질 더러운 여배우를 연기하는 셰어는 프로그램을 망치겠다는 꿍꿍이로 월트를 TV쇼 주인공으로 출연시킨다. 브라운관 안에 미처 감추지 못한 밥의 파랗게 질린 얼굴이 어른거릴 때 객석에는 웃음이 출렁거린다. 메릴 스트립이 특별 출연한 마지막의 뮤지컬 장면(<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각색 혹은 패러디한)은 영화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 중 하나. 간간이 등장하는 쇼비지니스 세계에 대한 가벼운 풍자도 톡 쏘는 맛의 괜찮은 양념으로 작용한다.
모르긴 해도 모종의 노선변경이 없었다면, 옆구리가 붙은 채 버거를 만들고 연기를 하는 이 형제에 대한 사람들의 비웃음은 좀더 강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기이할 정도로 낙천적이고 당당한 샴쌍둥이 형제에게 그만 감정을 이입해버린다. 그렇게 해서 <붙어야 산다>는 드라마와 코미디 중 어느 한 극단에도 이르지 않은 신종장르라는 기이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동성애를 놀려먹는 태도를 비롯, 여전히 악취미의 냄새를 숨기지 않는 <붙어야 산다>가 사랑스럽다면 그건 죄책감을 벗어버린 채 묘사한 장애인 형제의 매력이 자연스럽게 스크린 안을 흘러 다니는 탓이다. 혹은 전작들이 남긴 '나쁜 취향의 유산'을 부인하지 않은 가운데 대상에 따뜻한 관심을 첨가한 미더움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