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리버리한 배심원 존 쿠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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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강점은 다양한 장르에 있어서 일정 수준의 영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다양한 경험에 의해 축적된 노하우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법을 중심에 놓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공방이 오가는 법정 영화를 할리우드 영화 외에 제대로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할리우드의 전유물이 아닌가 싶다.
특히 배심원 제도라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제도는 자칫 단순화 될 수 있는 구성을 풍성하게 꾸며주는 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 배심원 제도가 우리에게는 좀 먼 남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지만 법의 판단이 판사와 검사, 변호사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통사람의 기준에서 판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런어웨이는 법정 내에서의 공방보다는 그 밖의 배심원들 즉 법정 밖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존의 법정 영화와는 약간은 다른 색다른 시각으로 한 사건의 해결점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영화는 총기 난사 사건으로 무고하게 남편을 잃은 한 미망인이 총기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생명을 앗아가는 총기를 한 자루라도 더 팔려는 총기회사는 승소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만약 이 싸움에서 패하면 그동안 총기 사고로 숨진 사람의 유족들의 소송이 연달아 발생하는 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건 배심원 제도가 있기에 가능한 싸움이 아닌가 싶다. 딱딱한 법전에 명시된 문구만으로는 총을 쏜 사람만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배심원 제도는 이렇게 규격화된 법전처럼 딱딱한 결론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일반화된 의견의 수렴이 그대로 법으로 규정된다. 때문에 일정부분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이 있다. 영화는 바로 이 부분을 파고든다.
| 제발 돈 주고 배심원 좀 사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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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회사의 배심원 컨설턴트인 랜킨 피츠(진 해크만)는 그야말로 최첨단 시스템이 갖춰진 지휘본부에서 배심원들의 면면을 분석한다. 배심원들의 약점을 들춰내 그걸 무기로 자신들의 손을 들어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총기회사의 이런 불법적인 행위에 맞서는 건 변호사 웬델 로(더스틴 호프만)가 아니라 배심원 중 한 사람인 니콜라스(존 쿠삭)와 그의 애인 말리(레이첼 와이즈)다. 말리는 니콜라스가 배심원 중 한 명이라는 상황을 무기 삼아 나머지 배심원들을 설득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랜킨 피츠와 웬델 로에게 거액의 거래를 제시한다. 그동안 법정 영화의 대부분은 거대기업들이 뒤에서 공작을 펼치는 사이에 변호인은 오로지 진실만을 쫓았던 선과 악의 구도에 그쳤다면 이 영화는 새로운 삼각구도를 형성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과연 정의로써만 정의를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정의를 지키기 위해 약간의 편법이라 할 수 있는 악으로 맞설 것인가? 물론 여기에 결론은 없다. 각자의 판결에 맡길 뿐이다.
말로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또 다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랜킨 피츠는 누가 죽어나가든 그야말로 많이 팔기만 하면 된다는 총기업자의 모습을 완벽히 대변한다. 과연 랜킨 피츠는 말로와 니콜라스의 정체를 밝히고 또 그들의 정체가 밝혀진다면 첩보원 방불케 하는 그의 수행원들이 이들을 가만 놔둘 것인가? 또 말로와 니콜라스는 랜킨 피츠와 웬델 로 중 누구에게 배심원들을 팔아 넘길 것인가? 또 이기기 위해 과연 변호인인 웬델 로가 이 검은 거래를 받아들일 것인가? 마지막으로 니콜라스는 다른 배심원들을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동시에 많은 질문을 안고 이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한발씩 나아간다. 마치 심리 게임 같은 이 질문들에 하나 씩 대답하다 보면 당신은 이미 이 영화 속에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 큰소리 쳐봐도 결국 넌 내 희생양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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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법정 영화는 사실 결말이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져드는 이유는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치열한 공방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액션 영웅이 승리하는 공식과 같다. 악당에게 쉼 없이 쥐어터지다 뽀빠이가 시금치 먹고 힘내듯 한방으로 승부를 가르듯 마지막 판결이 정의의 편을 드는 게 대부분의 법정영화였다. 왜냐하면 이게 바로 관객들이 바라는 결말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기업들의 횡포에 묵묵히 참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억울한 심정을 영화로나마 풀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약자의 편에서 그들의 손을 들어준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존 그리샴이다. [타인 투 킬], [펠리칸 브리프], [의뢰인], [레인 메이커] 등 그의 소설 대부분이 영화화 돼 많은 사랑을 받았다. 늘 비슷비슷한 법정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사회적인 이슈를 포착하는 날카로운 시각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게 그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런어웨이 또한 그동안의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배심원이 주요인물이 되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잘 짜여진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건 뭐니뭐니 해도 배우들이다. 중년을 넘어 이제 노년의 연기력을 과시하는 진 해크만과 더스틴 호프만은 영화를 아주 안정돼 보이게 한다. 변호인으로서 사실은 별달리 한 일이 없는 역할인데도 더스틴 호프만의 무게는 앞에 나아가 진두 지휘하는 진 해크만에 밀리지 않는 중심 축을 이룬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흔들리는 추처럼 왔다갔다하는 존 쿠삭과 레이첼 와이즈는 선과 악을 넘나들며 영화를 어떻게 결말지을 것인가를 궁금하게 만든다. 특히 배심원들의 마음을 굳히기 위해 자신의 주장을 펴기보다 가장 강하게 반대 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관통시키는 존 쿠삭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여수를 향해 논스톱으로 달려가는 기차의 종착지는 당연히 여수다. 하지만 기차가 달려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통해 그 여행이 지루할 수도 굉장히 재미있을 수도 있다. 런어웨이는 바로 그런 종착지가 정해진 기차여행이랑 비슷하다.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충분히 재미있는 퍼즐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여행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