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위한 사전지식을 좀 깔고 가야 할 것 같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일본이 700년 동안 이어 내려오던 군사 정권인 쇼군이 메이지유신으로 해체되던 시기다. 때문에 막부파와 유신파의 대립으로 일본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통제에서 벗어난 무사들이 날뛰는 바람에 치안유지가 힘들어진다. 이에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무사를 모집해 1863년에 미부라는 마을에서 탄생된 게 신선조다. 이른바 수도의 치안을 담당한 경찰조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막부 말기에 최강의 검객집단이었다고 한다.
| 이번판은 장난이었다. 우리 친구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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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아픈 손자를 데리고 온 노인 사이토와 여 의사 남편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두 사람은 희미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한 사무라이에게서 접점을 찾게 되고 시간은 과거로 올라간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기억의 조합이 칸이치로의 삶을 영상으로 불러온 것이다. 칸이치로는 신선조에 신입대원으로 입대하는데 순박한 외모와 달리 뛰어난 칼 솜씨에 의해 단박에 신입대원들의 무술지도를 맞게 된다. 하지만 평소에는 무사다운 장중함이나 기백보다는 고향자랑이나 늘어놓는 말 많은 무사 그러니까 보통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걸 무사의 수치라 느낀 선배 사이토는 칸이치로를 제거하려하지만 그의 뛰어난 솜씨에 그냥 "솜씨 한 번 보고 싶었다"는 말로 둘러대며 칼을 거둔다. 이후 두 사람은 항상 서로를 경계하는 관계가 된다.
| 웃음과 비장함을 동시에 느끼게하는 나카이 키이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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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칸이치로의 무사답지 못한 행동은 나날이 늘어간다. 명예와 대의명분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무사가 떳떳하게 돈을 요구한다. 칸이치로는 마치 돈을 위해 신선조에 들어온 듯 돈을 밝혀대기 시작한다. 할복하려던 동료가 반대로 살고 싶다고 칼을 들고 날뛸 때 칸이치로는 단칼에 그의 목을 벤다. 그리고 상사에게 칼에 흠이 생겼다며 칼을 바꿔야겠으니 돈을 달라고 한다. 한마디로 칸이치로와 돈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도대체 무사다운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사이토가 그렇게 돈을 밝힐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아주 가슴 뭉클하게 보여준다. 칸이치로가 대의명분을 위해 살아갈 때 너무 가난해 아내가 셋째 아이를 몸종으로 들여보내고 자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칸이치로는 자신의 검으로 이제 가족을 부양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때문에 칸이치로는 그동안의 무사와는 다른 현실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는 같은 사무라이이야기를 보여주면서도 칸이치로의 이런 모습 때문에 색다르게 다가온다. 그래서 영화는 간간이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건 전적으로 칸이치로를 연기한 나카이 키이치 몫이다. 나카이 키이치는 무사의 비장함 그리고 코믹함, 가장의 따뜻함까지 이 영화를 통해 전부 보여준다. 영화에 생동감이 넘치는 건 그의 이런 넒은 연기 폭이 가져온 효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칸이치로는 부드러움이 어떻게 강함을 이기는지를 보여주는 캐릭터다.
| 무사의 최후는 죽음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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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칸이치로는 정작 자신이 나서야 할 때는 죽음을 불사한 사무라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진정한 무사다. 이미 돈 때문에 어릴적 친구이자 조장인 지로에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번을 뛰쳐나와야 했던 칸이치로는 마지막 순간 천황파로 들어오면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거절하고 총탄이 빗발치는 적진을 향해 뛰어든다. 아무리 가족을 위해서 라지만 두 번의 배신은 무사로서 인정할 수 없는 치욕이었던 것이다. 가장으로서의 따뜻함과 애절함, 칼날 하나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무사의 비장함은 히사이시 조의 음악에 맞물려 오래오래 가슴에 남는다. 그가 들려주는 음악은 칸이치로의 소탈한 모습과 닮아있다. 음악은 영화가 주는 감동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관객들을 눈물짓게 한다.
이 영화에서 제일 뜻밖인 부분은 원작자가 철도원의 아사다 지로라는 것이다. 영화를 끌어가는 이야기가 철도원과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철도원에서 역장은 자신의 소임인 역을 지키기 위해 딸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한다. 그야말로 장인정신의 진수를 보여줬다면 이 영화는 한 사무라이의 인간적인 모습이 초점이다. 오토마츠 역장과 칸이치로는 일과 가족이라는 개념을 놓고 보면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한 작가의 의식이 이렇게 작품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일본 사무라이 영화라 해서 화려한 검술을 생각한다면 분명 이 영화는 따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명예를 위해서 기꺼이 할복까지 마다 않는 사무라이라는 점에 비추어 색다른 칸이치로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면 충분히 흥미진지하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무사의 기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칸이치로의 고뇌를 느끼는 순간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 강한 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