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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종기, 도란도란, 보글보글 이런 말들, 추운 줄도 모르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던 볼 빨간 소꿉친구들도, 콧등이 까매지도록 구워대던 밤, 고구마, 멀리서 들려오는 ‘찹쌀떡 사려, 메밀묵’을 자장가 삼아 잠들던 외풍 심한 아랫목. 가난하고 힘들어도 정겨웠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아픈 기억에 앞서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영화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김동원 감독이 대학 졸업작품으로 만들었던 단편 <81,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에서 어두운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살짝 탈색 시키고 그 위에 환타지를 살포시 얹어 만든 동화적 과거 회상과 같은 영화다.
해적(이정진), 봉팔(임창정), 성기(양동근)는 학교 월담을 밥 먹듯이 하며 동네 불량배들과 주먹다짐으로 소일하는 고등학생. 어느 날, 똥지게를 지던 봉팔의 아버지(김인문)가 사고를 당하면서 봉팔이 그 일을 대신하고, 봉팔의 동생 봉자(한채영)는 빚을 갚기 위해 술집으로 일을 나간다. 봉자에게 첫눈에 반한 해적은 봉자를 나이트 클럽에서 구해내기 위해 디스코 경연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정치적 격변기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줄거리 상으로 보자면 똥지게를 지는 봉팔과 술집에 나가는 봉자 남매를 통해 암울했던 시대를 조명할 수도 있었겠지만, 모든 일은 그저 일회성 사건, 지나고 보면 추억인양 아름답게만 그려진다.
옛사랑과 닮은 봉자를 데리고 간 나이트 클럽 사장(이대근)은 조직의 보스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로맨틱(혹은 왕창 닭살) 멘트를 날리면서 뜬금없는 춤 대결을 해적에게 제안하는 낭만적인 면모를 보이고, 성기 어머니를 춤바람 나게 했던 춤선생은 처음엔 분노의 주먹질을 받아야 했지만 급기야 이들 세 사람을 돕는 강력한 지원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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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시대적으론 80년대를, 공간적으론 철거직전으로 보이는 좁은 골목을 배경으로 삼은데다, 제도권을 비웃듯 월담하는 청소년들이 주연이기에 그런 흔한(?) 의도를 엿보려고 했던 초반의 미간 찌푸림을 풀고 나서야 영화의 새로운 재미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제는 사라진 병우유가 보이고, 불붙은 연탄을 집게로 쳐 갈라내는 장면도, 갈래머리 소녀와 목욕바구니 낀 옆집 언니도…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아스라한 추억 속으로 이끄는 조성우의 음악이다.
어설픈 주먹질 장면에 조차 잔잔히 흐르던 음악은 눈 내리는 평화로운 엔딩 장면의 “Song from the snow”에서 절정에 달한다.
지나간 과오는 모두 잊고, 행복한 장면들로만 윤색하는 것이 물론 언제나 바람직한 회상은 아니겠지만, 다투고 오랫동안 소원했던 동무를 오랜만에 만나 좋은 것만 떠올려 이야기 나누듯, 스산한 겨울 밤에 따끈한 국물 한 그릇과 함께 나누는 듯한 이야기. 그런 회상도 마냥 나쁘지는 않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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