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그리고 즐겼던 사람이라면 <싸이퍼>는 그런 기대와 즐거움을 어느 정도 다시 한번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임을 먼저 알려주어야겠다. 아니, 단순히 정육면체의 놀이기구에서 살육을 벌였던 <큐브>에 비해 <싸이퍼>는 더 넓은 세상에서 더 큰 스케일로 관객과 머리싸움을 벌이며 다시금 ‘빈센조 나탈리’라는 이름을 되뇌게 한다. (확실히 스케일은 커졌다!)

<큐브>라는 작품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단순히 저예산으로 나름대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의 심리와 자아에 대한 고찰 그리고 독립적일 수 밖에 없는 개인에 대한 공포를 무채색 미지의 공간에 뿌려놓았다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새로운 공간을 넘어 다음 공간에는 더 무서운 부비트랩이 숨어 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지는 혼돈과 공포는 인간을 잠식해 죽음으로 몰고 간다. 반목과 갈등 그리고 화해와 자기반성은 밀실이라는 좁은 공간을 배경으로 관객들과의 머리싸움을 벌이며 신중하게 이야기 되고, 그러한 영화적 구성은 폐부를 파고 들어 충격과 열광을 이끌어 냈다.

<큐브>에 이은 <싸이퍼> 역시도 전작에서 하지 못했던 자아에 대한 고민, 그리고 타인과 나에 대한 갈등 등을 그 주제로 삼으며 관객과의 두뇌싸움을 벌이는 작품이다. 다만 이번에는 눈이 시리도록 하얀 육면체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적인 세상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주인공을 따라 움직이는 이야기들은 놀랍도록 긴장감 넘치며, 관객들로 하여금 감정의 이입을 유도해 집중력을 배가한다. 아주 일반적인 이야기지만, 그런 일반적인 대중의 심리를 변주한 감독의 능력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 없다. 근 미래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산업스파이라는 설정과 세뇌, 잃어버린 기억 등의 소재를 통해 흥미롭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후에 관객들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으로 마무리된다.

제레미 노뎀, 루시 리우 등 배우들의 호연(특히 루시 리우는 그 어떤 영화에서보다 놀라운 연기력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가능성은 이 영화를 통해 빛을 발하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 그녀가 나왔던 작품들 가운데 최고는 드라마 ‘앨리의 사랑만들기’ 다음으로 이 작품을 꼽고 싶을 정도다)과 재미있는 설정 등은 확실히 관객들을 충분히 매료시키는 무언가가 있지만, 아쉽게도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큐브>때 만큼 매끄럽지 못하고 흥미진진하지도 않다. 특히나 충격적인(?) 결말이 그다지 놀랍지 않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이들이라면 <싸이퍼>는 <큐브>의 아우라를 갉아 먹는 실패작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단순히 규모만 커졌다고 해서 감독의 역량 또한 신장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 <싸이퍼>를 통해 전해진다는 점은 아쉽기 그지 없다.

2003년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작품 <싸이퍼>는 공상과학소설을 영화를 옮긴듯한 신선함과 동시에 한국 관객들에게 특히나 잘 먹힌다는 반전과 스릴러 적인 색깔을 지니고 있어 일단 겉으로 보기엔 확실히 남다른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하지만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특히나 <큐브>에 대한 감화감동이 얼마나 남달랐느냐에 따라 <싸이퍼>는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실망뿐인 범작이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