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않다.
우리 누구도 밖의 바리게이트인 사회경제적 경계와 안으로인 정신적,영혼적 경계로부터 쉽게 이탈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늘 경계를 부수는 인간들이 있고 역사는 이들로인해 진보와 퇴보를 거듭해왔다. 사회의 악인 범죄자나 악의 꽃인 혁명가, 예술가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이들의 목적은 전복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세상에서 알아먹는 도덕, 예술경향, 가치관들을 엎어버리고 갈아버린다. 그리고 그 땅에 언제 튀울지 모르를 새싹을 꿈꾸며 씨앗을 뿌린다. 대부분 이들의 삶은 불행하다. 발끝이 딛은 세상을 거부하고 가슴으로 꿈꾸는 다른 세상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이다.
불행의 결과로 범죄자가 죄를 짓는다면 예술가는 고통의 댓가로 작품을 만든다. 그래서 예술가에게 고통과작품은 시줄과 날실이다.
프리다칼로는 알다시피 화가다. 영화사를 털어서 한 여류화가를 담은 영화가 세 편이나 다룬 적이 없는 한 멕시코 여류화가이다.
그녀는 소아마비,교통사고, 수차례유산, 실연등의 개인적 고통을 그림속에 기록했고, 남성과 억압이 지배하는 멕시코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며 겪은 상처를 페미니스트이자 공산주의자로 저항했다. 자유로이 사랑했음에도 단 한명의 남자곁을 죽을때까지 떠나지 못했고 연인으로서는 버림받은 고독한 삶을 ‘디에고 내 오줌에서, 디에고 내 입에서, 내 심장에서 나의 광기에서, 나의 꿈속에서...’라는 글로 시로 표현했다.
그녀의 그 외의 이력에도 화려하다. 세계적인 벽화화가 디에고의 아내였으며, 동성연애자, 대마초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보그 잡지 패션모델, 유명한 사진작가 모델이며 당대의 유명한 남자들을 악세사리마냥 달고 다녔다. 이러한 이력들은 그녀가 내면의 고통과 열정, 광기와 싸워대면서 경계를 허물고자 죽는 순간까지 싸워대며 나온 부산물일뿐이다. 누구나 고통스러울때 아프다고 말하기는 쉽다. 처절하게 피가 떨어지는 고통을 두 눈 똑바로 오래 응시하기란 더욱 쉽지 않다. 그녀에게는 그 응시의 결과가 작품이다.
<책속에서>
지금 와 기억에 남은 건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란 페미니스트다운 편지 글과 공산주의 순교자의 상징인 레온 트로츠키의 연인이였다는 것에 놀랬던 점이다.
그녀의 많은 빠돌이들중 앙드레 브로통은 그녀의 작품적 깊이와 내면을 흠모하여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폭탄 주위에 둘러진 리본이다.‘란 문장까지 헌사했다.
이 명문장은 그녀를 다룬 두 번째 다큐영화인 <프리다 칼로:폭탄 주위에 둘러진 리본(A Ribbon Around Bomb,1992, 감독 켄 만델)>의 다큐 영화 제목으로 쓰였다.
이 다큐는 그녀의 사진과 발자취, 시, 그림등을 멕시코의 포크송을 들려주며 이분법적 구조속에서 다뤄진다.
그녀의 영혼과 몸, 유아기와 성년기, 그녀의 개인적 생활과 공적인 생활, 사적인 여성으로와 공적인 여성으로서의 모습으로 나누어 그 모습을 담은 그림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들이 고통,절멸,상처를 잔인하고 아픈 상징적 이미지로 대중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아픔보단 즐거움에 상처보단 치료에 민감한게 인간들이다.
<미술관에서>
뉴욕 현대미술관을 갔다가 이층 전시관에서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과 그녀의 작품을 한점 보았다. 신기한 건 책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니까 다르다는 것이였다. 책보다 영화가 더 실감나고 현실이 더 실감하는데 동감했다.
디에고가 밖의 세상인 멕시코의 역사와 농경문화를 굵은 터치로 담았다면 그녀의 작품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를만큼 격렬하고 섬?한 내면세계를 다룬다. 디에고가 피카소나 밀레를 닮았다면 그녀는 표현기법에서는 조지아 오키프를 상징적인 메시지로는 에곤쉴레를 닮았다.
끊어진 정맥, 칼로 찔려서 온 몸과 피가 난무하는 바닥, 유산된 죽은 아이의 슬픈 눈동자, 뽑혀진 심장등 그녀의 그림들은 수술실의 장면을 현장중계한다.
디에고가 그린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1931년작>나 그녀의 초상화를 보고 책과 다르구나 생각했던 것은 이런 점이다. 초상화 속에서 그녀는 해산의 고통을 막 마친 여인처럼 숭고하고 맑아보였다. 피는 낭자했어도 눈가에는 위엄이 서렸다. 프리다(2002)에서 다루지 못한 그녀의 깊이를 직접 만났다.
처음 그녀를 다룬 다큐영화는 폴 레덕(Paul Leduc) 감독의 < Rest of the world, 1984년 >이다. 잘못 보면 <나는 병자에다가 평생 사랑한 한 남자한테 버림받고 아무나 하고 뻑하고 남은건 상처밖에 없어>라는 한 개인의 재미난 이력과 상처가낳은 자뻑 그림들로 보인다.
다큐안의 그림들과 미술관에서 본 그림을 떠오르며 한 동안 서있었다.
고통을 판타지로 덮어씨우지 않고 그대로 맞서는 건 낭자한 피보다 더 섬?하고 처절하게 아프다. 그녀는 끝없이 자신을 거울로 들여다보며 피투성이 상처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다 못해 그녀내고 또 다시 응시했다. 피가 범먹인 유산된 아이를 그렸고, 평생 사랑한 단 한명의 남자, 디에고가 여동생과 색스를 하고 버리고 떠날 때에는 칼로 찔려 온 몸이 피투성이인 자신을 그렸다. 코 앞에서 숄을 두른 그녀의 초상화를 보면서 한 여자를 영화 세편이나 만들어낸 이유를 영화관도 아닌 미술관에서 알게 되었다.
<프리다칼로 세 번 째 영화 속에서>
존 휴스턴 감독의 물랭루즈(1952)가 화가 로트렉으로서의 예술과 불행한 삶을 조명했다면 바우즈감독의 물랭루즈(2001)안에서 로트렉은 그저 화려한 뮤지컬 조연역으로 떨어진것과 같다.
영화의 구조는 역순환적이다.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죽음으로 돌아간다.
시작은 집에서 죽어가는 프리다에서 소녀기를 거쳐 화가로서의 삶과 결혼생활의 무대인 뉴욕과 파리등에서 떠도는 그녀가 다시 멕시코의 집에서 죽음으로 끝난다.
왜 첫 장면과 많은 장면을 좁은 공간인 그녀의 집으로 설정했을까. 그녀의 집은 지렁이눈썹과 멕시코전통의상등이 상징하는 그녀의 내면적 고통과 열정을 보여주는 물리적 공간이다. 그녀는 내면으로 집착해서 우아하고 정교한 멕시코 전통의상, 모자, 장신구를 부적처럼 달고다녔으며 옷은 멕시코여성인 그녀의자아와 작품 세계까지 보여준다. 영화속에서 그녀나 감독이 의상에 집착하고 아카데미 의상상까지 받게된 이유기도하다.
그럼에도 개인과 작품의 내면을 보여주는 공간이 꼭 집이여야만 되었나싶다. 그녀가 병자였어도 닫히고 좁은 공간은 지루함과 답답함을 만들어내고 자유로운 영혼이였던 그녀의 이미지와도 엇갈린다. 그 공간이 아담하고 화려했지만 말이다.
이 영화는 다큐들과 달리 화면 중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같은 교통사고 장면, 뉴욕의 엠파이어빌딩에서 떨어지는 킹콩의 모습과 멕시코 해골들의 실험적 에니메이션과 멕시코식 판소리 배경음악인 탱고음악을 넣는다. 그녀의 고통이자 초현실주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그 걸 보고 아. 초현주의란 실험음악과도 같고 괴기스럽거나 장난스런 에니메이션같기도 하구나 생각할 사람은 아마도 없겠지.
초현실적인 판타지는 직접 보여주는 것보다 현실속에서 관객이 판타지 재료를 가지고 상상하여 만들어 낼 때 부유감을 느끼게해준다. 판타지는 의식의 영역보다 무의식의 초월적인 영역에서 놀기 때문이다.
몇가지 투덜대는 소리에도 영화는 재밌다. 재미를 돋구는 장치를 넣어서이다.
디에고와 프리다와의 첫 만남은 그가 아내외 모델과 빠굴씬을 찍는 순간 프리다의 도발적인 외침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관능적인 탱고음악에 맞춰 디에고의 친구이자 정부와 춤을 추고 뜨거운 키스를 나눈다. 동성연애자로 찍히는 순간이다. 디에고만 목졸라 죽이지 않았을 뿐 유혹적이고 도발적이며 관능적인 팜므파탈의 이미지이다. 반면에 대센 남자들과 한 판 겨루면서 목청을 높일때는 급진적 페미니스트이자 혁명론자인 로자 룩셈 부르크같다.
사실 후자의 면이 더 부각되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보단 그녀가 가진 도발과 관능, 당당함을 ?느라 감동이 반감되었다. 그녀의 당당함이란 병,유산,실연등의 고통과 장렬히 맞서 싸워대며 나온 부산물이다. 영화는 다른 재미거리를 주느라 그녀가 왜 멋진지, 왜 당당한지, 어째서 멕시코 여자가 미국내에서 여신으로 숭배되는지 파헤치지 보단 천재화가인 디에고의 일급정부 역을 그리느라 바쁘다.
예술적인 깊이와 고통속런 내면을 연기해내기란 셀마 헤이웍도 벅찼다. 관능과 강인함은 지렁이 눈썹을 연필로 그려서 만들어냈어도 고통을 껴안고 죽을때까지 싸워댄 한 인간의 내면적 고통과 열정, 광기는 한 여자로서도 화가로서도 페미니스트로도 담아내지 못했다. 불해이다. 그 멋진 여자가 프리 섹스주의자에 동성연애자로 몰리다니. 더 불행한 건 그녀의 벅찬 부분을 화려한 조연인 에드워드 노튼, 안토니오 반데라스, 에슐리 쥬드, 제프리러쉬등이 나서서 메꿔주려고 무진장 노력하는 점이다. 조연은 역시나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화에서 제대로 된 연기를 보인 이는 디에고역과 탱고가수인 릴라 다운즈 뿐이다.
이 영화는 전기영화라고 말하기 어렵다. 닮고 싶고 감동을 받는 위인전보다는 재밌는 대중소설을 읽는 것 같다. 그런데도 감동을 주는 장면이 있다. 그녀가 연기해내지 못한 감동을 들려주는 릴라 다운즈의 음악이며 그 음악이 들릴 때 눈물을 떨구는 프리다이다.
멕시코의 여성들은 우리마냥 남자가 우선이고 여러 첩을 거느린 가부장적인 사회와 농경문화를 가졌다. 그 안에서 여성들은 참 힘들게 살면서 ‘한’처럼 강한 고통을 이어왔다. 그녀들은 마가레때마냥 소금을 찍어먹으며 마셔야 될 만큼 독하고 화끈하며 술의 색마냥 해학적이다. 릴라 다운즈가 프리다의 인생이자 한 많은 멕시코 여성의 질곡을 들려준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성들도 독하고 화끈한데 왜 해학적이지는 않을까나. 너무 눌려서 웃음도 잃어버렸나.
처음 영화가 만들어 지던 1954년에 죽은 한 멕시코 여류화가의 인생은 미국문화속에서 여신으로 숭배된다. 천재 벽화화가인 남편 디에고의 인기는 미술관 한켠에서나 찾아볼 뿐이다. 프리다는 자수성가의 역사를 가진 미국역사처럼 현대인에게 자아성장(Self-endowment)의 아이콘이자 전설적인 페미니스트이며 보헤미안 집시 걸로 떠받들여 진다. 미술관 매점과 서점 한켠을 가득메운 프리다 일기장, 프리다 컵, 프리다 옷, 프리다 악세사리부터 미국 기념우표인 프리다 우표까지 말이다.
그림에서 밥먹는 숟가락까지 모든 경계를 허물어뜨린 프리다이다. 그녀의 작품이 왜 주목을 받는지 영화속에서 트론츠키는 들려준다. ‘우리는 고통속에서 모두다 외롭다. 그 점을 당신의 작품이 보여준다.’
그녀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지금의 명성을 누렸을까. 죽음은 기꺼이 모든 걸 용서해준다.
특이 유명인일 경우 덧칠하기 명수다.
혁명이란 형태와 색채의 조화이며 모든 것은 생명의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머문다. 누구도 다른 누군가와 헤어질 수 없다. 누구도 자기자신만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만물은 전체인 동시에 하나이다. 불안.고통.쾌락.죽음 이들은 존재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고 결국은 하나이다. -자서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