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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소년’이란 왠지 귀여운 어감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인디언 동요를 기억하시는지? 바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등장하고 있는 노래이다. 어릴 적 이 소설에 매료된 경험이 있던 필자는 어디선가 귀동냥하니 <아이덴티티>가 이 소설의 모티브와 유사하단다. 그래서 필자의 마음은 기대감으로 몹시 넘실거렸다. 더구나 연출을 맡은 제임스 맨골드 감독에 대해서는 그의 전작 <처음 만나는 자유>를 재밌게 보았던 터라 어느 정도의 신뢰감이 있었다. ‘자, 충분히 식욕이 동하니 어디 맛좋은 요리를 보여주세요’라는 심정으로 보기 시작한 <아이덴티티>의 도입부는 속도감있는 진행에 재미와 쾌활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짧은 플래시 백을 사용하여 순차적인 내러티브를 재치있게 비켜가고 있었던 것.
예를 들면 이런 것인데, 늦은 밤에 부모와 한 아이를 태운 자동차가 빗길을 추적추적 달리고 있다, 그런데 도로에 떨어진 하이힐 한 짝을 모르고 지나치다 타이어가 요란하게 펑크난다, 화면이 ‘씽’ 바뀌더니 어느 젊은 여자가 내리쬐는 오후의 태양 아래 스포츠카를 몰고 있다, 그녀가 뒷좌석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하다가 실수로 하이힐 한 짝을 떨어뜨린다(눈치채셨는가? 바로 이 하이힐이 타이어 펑크의 가해자다!). 바로 이런 스무 고개식의 교묘한 플래시 백으로 10명의 등장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으니 얼마나 신선한가.
하지만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된 필자는 혹자들이 애거서 크리스티를 언급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지만, 확실히 관계가 없는 영화임에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고로 소설의 멋과 맛도 지니지 못했다!). 줄거리를 살짝 언급해 볼 터이니 여러분들도 한번 판단해 보시라. 빗방울이 억수같이 떨어지는 음울한 밤, 10명의 인물들이 네바다 사막에 위치한 어느 낡은 모텔에 우연히 모여든다. 리무진 운전사와 여배우, 경찰관과 그가 호송하던 살인범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통신이 두절된 그곳에 갇힌 채 하나 둘씩 살해당한다. 의문의 연쇄 살인자는 투숙했던 방의 홋수를 카운트 다운으로 진행시키면서 차례로 사람들을 죽인다. 그리고 그들의 주위에는 덩그러니 방열쇠를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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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일명 ‘밀실(密室) 사건’으로 분류되는 사건이 등장한다. 아무나 들어가거나 나오기가 쉽지 않은(경우에 따라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밀폐된 곳에서 살인이 발생하는 것. 사실 설정 자체가 비논리적인 밀실 사건에서, 그 비논리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추리 소설이나 영화의 묘미다. 그래서 그 결말은 보는 사람들의 예측을 뒤엎는 게 보통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예측이 빗나간데 대해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교묘한 트릭에 감탄하기 마련이다. 기상천외한 범행 수법에다가 범인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이 범인으로 밝혀지는 등 리얼리티가 좀 떨어지면 어떠랴. 스릴과 서스펜스, 그리고 흥미만점의 아기자기한 구성을 즐길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여기에 반발한다면, 영화 <아이덴티티>는 권유할 만한 추리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도 밀실 사건의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서 『존재와 무』, 옛날 인디언들의 공동 묘지였던 모텔의 섬뜩한 비밀, 같은 생일을 가진 10명의 인물이라는 의미심장한 공통점 등과 같이 흥미로운 맥거핀들을 장면장면마다 흩뿌려 놓으며 관객 나름의 추리력을 발동시키는 이 영화. 하지만 그러한 몇 가지 단서들을 기초로 지적인 퍼즐을 즐기려던 관객이라면, <아이덴티티>가 보여 주는 황당한(?) 반전에서 어쩌면 맥이 빠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러한 결말이 아주 눈치를 못 챌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결말을 안 뒤에도 이 영화의 내러티브 중 상당 부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스포일러 때문에 말해줄 수 없기는커녕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아 또 다시 봐야 할 것 같은 영화 <아이덴티티>. 당신이 모든 이야기를 이해했다면 정말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 아니 누가 정말로 죽었는지를 내게 알려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