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탄승" 국내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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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윤발이 나오는 걸 몰랐다면, 제가 <방탄승>이라는 이상한 제목의 영화를 볼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무슨 영화를 볼까 하고 매표 창구 앞을 서성이다가, 예고편을 틀어주는 모니터에서 주윤발의 얼굴을 본 순간 지체 없이 <방탄승>의 티켓을 끊어 한달음에 입장해버렸지요. 그러니까 저는 감독이나 나머지 배우들이 누군지도 알지 못한 채, 무슨 뜻인지 가늠해 보지도 못한 제목의 영화에 제 인생의 두 시간을 맡기게 된 겁니다. 단지 주윤발이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화에 대해 뭐든 써야 하는 입장에서는, 마음에 안 드는 영화보다, 할 말이 없는 영화가 더 마음에 안 들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지요.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주윤발이 저에게 협박 전화를 걸어온 것도 아니고… 어떤 영화인지 사전에 알아보지 못한 저의 불찰 또한 나무라지 않고 넘어가렵니다.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거니까요. 줄거리만 따지면 주윤발이 나오지 않았어도 보러 갈 만큼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였으니까요. 다만, 보고 나서 할 말이 없는 걸 어쩌나요? 주윤발 얘기를 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장국영은 죽고 주윤발은 갔다… 그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갔다가 돌아올 수는 있겠지만,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아무튼 <방탄승>에서 주윤발은 노쇠한 몸을 이끌고 휴가를 즐기러 군중들 속으로 사라져갔다…
저는 주윤발에 대해 잘 모릅니다. 주윤발의 진짜 팬들이, 니가 윤발이 형 멋을 알아? 하고 물어온다면, 저는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꺾으며 한 수 가르침을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도 한 가지 아는 게 있습니다. 기억하는 거지요. 주윤발의 미소… 그 미소에 담긴 여유를 잊지 않고 있는 겁니다. 왜 잊을 수 없나요? 도대체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닌데 부리는 여유니까요. 자기가 죽었다 깨나도 못할 일을 누군가 하는 걸 보면 강한 인상이 남는 법이지요. 그런 영화는 현실감이 없다고 싫어하거나, 더 나아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성토할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 영화도 있어야지요. 어차피 영화니까요. 어차피 제가 현실에서 영화 속의 주윤발처럼 수많은 적으로 둘러싸이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런다 해도 주윤발처럼 성냥개비 입에 물고 슬로우 비디오로 춤추듯 움직이며 쌍권총을 뿜어댈 담력이 생길 리는 없으니까요.
| 주윤발 |
| | 주윤발, 숀 윌리엄 스코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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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승>에서도 주윤발은 많이 웃습니다. 무술의 고수답게, 그리고 심오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스님답게 여유가 철철 넘칩니다. 그런데 저는 왜 그 모습에서 도무지 매력을 느낄 수가 없을까요? 여전히 제가 흉내 낼 수 없는 행동과 성품을 보여주는데, 왜 별로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걸까요? <영웅본색>의 주윤발과 <방탄승>의 주윤발이 보여주는 여유가 어떻게 다른지 따져보면 답이 나올 듯합니다.
<방탄승>이라는 영화에 대해 한 마디는 해야겠네요. 다 집어치우고 딱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윤발이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는 걸 모를 수는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주윤발이 죽는다면, 그나마 간신히 줄거리를 이어오던 이 영화는 파탄을 맞는 거지요. 그래서, 악의 화신인 나치의 잔당이 무슨 공포 영화의 살인마처럼 살아났다가 다시 죽고 주인공들은 하나도 안 죽는 뻔한 결말은 오히려 다행스럽습니다. 겨우 영화의 꼴을 갖추기는 한 거니까요. 설마 이런 재료로 속편을 만들려는 심사는 아니겠죠. 영화 얘기는 다시 접고 주윤발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주윤발이 죽을 리가 없기 때문에, 그의 여유는 힘을 잃을 수밖에요. 속편은 쌍둥이 동생을 내세워서라도 만들 수 있는 거니까, 주윤발은 무조건 죽어야 하는 겁니다. 죽는다는 건 확실히, 살아남는 것과는 다른가 봐요. 죽을 줄 뻔히 알고 본다 해도, 마침내 죽는 꼴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또 마음이 움직이잖아요. 그러니까 보고 또 보는 컬트의 사제들이 생겨나는 거지요. 알고 보니까 더하고, 볼수록 더한 겁니다. 저는 감히 주윤발의 생명은 죽음에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 주윤발 |
| | 주윤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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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것 때문에, 주윤발이 죽게 되기 때문에, 그의 여유는 힘을 얻을 수밖에요. 그의 여유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던 겁니다. 그걸 감상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비판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자유라고 놔두고요, 주윤발의 여유에 깃들어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잊을 수 없는 거지요. 못 잊어서 또 보고 싶은 거지요. 자신의 삶 속에서 흉내 낼 수는 없으니까, 흉내 내서도 안 되니까, 그를 따라 한다고 여유 잡다가 죽지도 못하고 스타일만 구기기는 싫으니까 말이에요.
그랬던 주윤발이 미국으로 가더니 아주 가버렸습니다.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돌아오려면 죽었어야 하는데… 애초에 그럴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으니… 게다가 주윤발이 돌아오려면 오우삼이 있어야 하는데, 그도 미국으로 가더니 딴 사람이 됐는지 웬만해선 주인공을 안 죽이지요? 아 글쎄 <방탄승>의 제작자가 바로 오우삼이라는 사실 앞에서, 주윤발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애타는 마음은 한낱 지난 시절에 붙들린 감상주의자의 헛된 미련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