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펙스 행성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한 남자, 프롯(케빈 스페이시)을 정신병원으로 이송하면서 시작하는 영화 <케이-펙스>의 결말은 마땅히 둘 중 하나일 것처럼 보인다. 외계인이거나, 아니거나. 그러나 그와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프롯 스스로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점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 그럼으로써 프롯은 실제로 외계인의 위치를 점하며(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이 전복적인 상황. 그는 통상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일반적인 이해의 지평에서 벗어남으로써 지당하게도 정신병원으로 가게된다), 영화는 도대체 이 열악한 행성이 어떻게 버티고 있는 지 확인하러 왔다는 그를 통해 익숙하고 상식적인 세상을 이상하게 바라볼 수 있는 낯선 시선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정신병원의 풍경. 그들이 앓고 있는 지독한 신경증들은 그러나, 프롯의 눈 속에서 단지 ‘그들’이 아닌 ‘당신들’의 모습이다. 그는 뉴욕의 심상한 거리를 바라보듯이 제각기 중얼거리고 멍하고 제 마음을 못 이기는 환자들을 바라본다. 프롯에 눈에 비친 이 세상의 이상한 점은 온갖 외부적인 방법을 동원해서(혹은 그렇기 때문에) 병을 못 고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상성’이 지닌 신경증에 맞닥뜨렸을 때, 정신병원에 가둠으로써 배제해 버리고 빨리 억누르려는 근대적 시스템이 지닌 맹점에 다름 아니다. ‘정상적’인 삶이 필연적으로 지닌 내부의 균열을 다만 꼭꼭 억압하도록 훈련된 근대적 지구인들이 외계인의 생각에는 문제가 된다. 균열을 치유하지는 못하고 곪도록 숨기고만 있는 이 불안한 상황은 대표적인 근대적 제도인 가족 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이 없다는 프롯을 집으로 초대하면서 ‘그에게 정상적인 가족을 보여주자.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마크에게 아내가 되묻는다. “우리 가족이 정상이라고요?” 그 가정방문에서 프롯은 마크의 의도처럼 정상적이기 때문에 완전한 가족의 개념을 이해하기보다는 마크 가족 내의 또 다른 상처를 보게 된다.
스스로 치유하도록 도와주면 좋을 텐데, 개개인마다 내재한 ‘자기 치유 능력’을 강변하면서 이 외계인은 나름대로 환자들을 돌보고 엉뚱한 그의 방법들은 족족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프롯은 스스로 해답을 찾아 나간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누군가에게 충고를 하고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면서. 아하, 이 행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관계’때문이구나.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그리워질’ 수 있겠구나.
가족주의에 기댄 미국식 휴머니즘의 전철을 밟듯, 이 영화 역시 마크를 빌어 프롯의 과거 가족 관계를 캐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판에 프롯은 또박또박 ‘관계’를 언급하면서 그 함정을 살짝 비켜나간다. 물론 ‘가족’에 대한 혐의가 말끔히 지워진 것은 아니지만 결국 당도하는 것은 ‘관계’이다. 그것은 훨씬 포괄적이고 보편 타당하며 여전히 순진하지만 분명 올바른 교훈이다.
때때로 현실적인 시공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빛의 틈입처럼 <케이-펙스>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린다. 우리가 본 외계인이 상황적인 맥락이 입증하는 현실적 존재인가, 한 환자의 뛰어난 두뇌 속에서 태어난 망상적 존재인가 하는 물음은 일종의 맥거핀일 지도 모른다. 분열되거나 신경증을 앓고 있는 현대 지구인의 자화상으로써의 임무를 수행한 프롯은 새로운 깨달음에도 불구, 정상적인 지구 사회에 편입하길 거부하고 훌쩍 떠나 모호한 타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역시 외계인의 역할에 충실한 엔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