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삶은 숨막히는 지하실에 뚫린 작은 창문 같은 거야. 그 창문 너머엔 구불구불한 해안선이 달리고, 그 저편에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바다가 있지. 난 이 반투명의 거대한 지하실에서 서서히 질식해 가고 있어.’ <플라스틱 트리>를 보다 보면 어느새 누군가의 이런 속삭임이 귓가에 울린다. 어디선가 읽었던 문구들이지만 어지러이 혼합되고 뭉개지면서 마음껏 재구성된 소리. 제길 그런데 어쩌라구. 그 목소리에 화답하고 있는 또 한 명의 불안한 나.
평온해보이는 어느 바닷가의 한 이발소. 그 곳에 이발사인 수와 그의 연인인 퀵서비스 배달원 원영이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수의 어릴 적 친구 병호가 찾아오면서 세 사람의 내면에 위험한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결벽증이리만치 깔끔하고 조용한 수는 알고 보니 어린 시절 정신 이상자인 어머니에 의해 여성성을 가지도록 키워져 왔고, 그 때문에 성기능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인물. 어딘가 어두워보이는 원영은 남자들로 가득한 직장에서 상습적인 폭력과 소외에 시달리고 있으며, 어떤 환경이든 무서운 기생력을 가진 듯한 병호는 불안정한 현실에 조응하는 격렬한 고독에 익숙한 인물이다.
이 영화는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려면 자아의 무게와 동시에 현실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쓸쓸히 보여주고 있다. 병호의 등장으로 억눌려 있던 트라우마에 확연히 시달리게 되는 수는 원영과의 진실한 사랑에 실패한다. 그건 수가 단순히 성적 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기 자신과도, 그리고 현실과의 싸움에서도 모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한 직업이 없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병호와 달리, 작은 이발소이긴 하지만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수.
하지만 표면적인 안정과 달리 수의 삶엔 꿈꾸기를 포기한 시커멓게 죽어있는 영혼이 자리한다. 그는 옥상에 해바라기를 심고 싶다는 원영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다. 겨울 바람이 부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파릇하게 꿈틀거리는 식물이 살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의 현실 인식은 냉철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해바라기를 심어 주는 병호의 영혼에 훨씬 더 끌리는 것은 우리들 삶 자체가 그처럼 놓을 수 없는 꿈 한 자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수의 경우 만큼은 아니지만 원영이나 병호 역시 자아와 현실의 무게감에 비틀거린 채 온전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음은 마찬가지.
이 영화는 결말로 향하는 이야기의 줄기는 통속성에 기반하지만, 그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모던한 이미지를 차용한다. 해변가에 자리잡은 이발소의 이미지와 그 주변부의 이미지를 충돌시키면서, 건조하고 비어있는 듯한 이발소 내부의 미장센으로는 인물들의 황폐한 내면을 표현하고, 바다로 향해진 이발소의 통유리를 통해서는 인물들의 갇혀진 희망을 보여준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이 영화의 결말부에 위치한 독특한 반전이자 효과적인 이미지의 충돌이다. 수가 원영의 머리를 잘라주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상상의 어긋남이 그것인데, 사운드에 의해 상상된 이미지와 다음 쇼트에서 나타나는 이미지의 배반은 관객들에게 당혹감과 놀라움을 선사한다(이 영화의 사운드는 몇몇 장면에서도 생각지 못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숨죽여 있는 듯 보이던 수와 원영이 영화의 중반 무렵부터 보여주는 내적 폭발, 예를 들어 수가 거울 위를 지나가는 바퀴벌레 등을 손으로 짓누르거나 날카로운 가위에 손가락이 베어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를 클로즈업하는 장면, 한편 원영이 헬멧으로 남자 동료의 머리를 마구 짓이기는 장면 등은 언뜻 김기덕 영화의 섬뜩성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그에 비해 훨씬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장면들이 불분명한 대사 전달이나 눈에 힘만 주고 있는 등 배우들의 다소 어설픈 연기 때문에 말초적인 깜짝 효과에 그치고 있는 것이 못내 아쉽다. 캐릭터의 갈등과 고민이 보다 충분히 살려졌다면 <플라스틱 트리>는 제법 매력있는 한국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그랬다면 정사 장면 등에 흐르는 프란시스 레이의 음악도 훨씬 빛이 발하지 않았을까).이 영화에 전적으로 손을 들어줄 순 없지만, 순간 순간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과 과잉성과 망설임을, 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모순의 음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고 싫음에 상관없이 모든 사고력을 뛰어넘어, 무질서하고 파괴적인 나약함을 내포한 예술에 종종 매료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