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 서두에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전부 그 이유가 제각각”이라고 기술한 바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가정이란 행복하기보다는 자칫 불행한 족쇄가 되기 쉽다는 얘기와도 의미가 통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불행해질 것을 알면서도 왜 사람들은 결혼과 가정이라는 틀 안으로 꾸역꾸역 자신을 우겨 넣는 것일까. 그래서 어떤 부부는 동상이몽(同床異夢) 아닌 이상동몽에 젖어보기도 한다. 남편 말고 애인이 필요해. 혹은 아내 말고 여자가 필요해. 말 그대로 각자 다른 사람과의 잠자리에서 같은 꿈을 꾸는 외로운 사람들이다.
앞에서 묘사한 정경을 담고 있는 건 <바람난 가족>의 포스터다. 한참 궁금한 게 많아진 일곱 살 짜리 아들은 입양아라는 사실 때문에 고민하는데 아빠는 일에 치여, 애인이랑 노느라 바빠 집에도 못 들어오고, 엄마는 옆집 사는 고등학생(시쳇말로 고삐리)이 거는 수작이 싫지 않은 눈치. 게다가 할아버지는 원수라도 진 듯 암팡지게 들이부은 술 때문에 세상을 하직하고, 한 번도 섹스하면서 오르가즘을 느껴본 일없다는 할머니는 초등학교 동창과 사랑에 빠져 예순 나이에 인생의 활황을 맞는다. 아무리 이거 너무 콩가루다. 베지밀이다.
이런 논리에서 본다면, 결혼과 가족 제도의 폭력성 아래 가족 모두는 동등한 피해자다. 그러나 현실의 권력이 보다 남자에게 주어져있다는 점 때문에,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주 제기되는 것이 약자인 여성의 자기 목소리 내기다. 억압받던 여성들이 스스로의 욕망을 돌아보는 것은 가부장제라는 공고한 성벽에 균열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그리고 <바람난 가족>을 광고하는 카피들 중 하나인 “남편이 아내에게 절대로 보여주지 말아야 할 영화”라는 문장은 영화가 의미 없는 삶에 반기를 든 가족, 그 중에서도 여성의 반란을 화끈하게 담아내 보여주리라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건 <바람난 가족>이라는 ‘문제적’ 영화에 대한 가장 적확한 추측은 되지 못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람난 가족>이 주인공 호정(문소리)의 욕망을 구체적으로 잡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호정의 뒤꽁무니를 지운(봉태규)이 줄기차게 쫓는 초반부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뻔뻔하고 섹시한’ 느낌을 주는 장면 중 하나다. 이웃집 아줌마를 사모하는 고삐리의 후끈 달아오른 심정은 모르긴 해도 <말레나>에서 모니카 벨루치의 뒷모습에 넋을 잃는 마을 남정네들의 그것에 뒤지지 않을 것. 호정은 결국 지운에 유혹에 넘어가기는 하지만, 아니 넘어가 주는 척 하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상대를 욕망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녀의 역할은 관음의 대상, 아이가 과자를 탐하듯 지운을 매혹시키는 대상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시어머니 병한(윤여정)에게 초등학교 동창과의 사랑, 혹은 섹스가 삶을 다시 보게 만드는 일대 사건이었고 주영작(황정민)에게 연과의 섹스가 활력소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나, 지운과의 관계가 호정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쿨한 여자 호정의 마음씀은 영화 내내 넓고 깊다. 아마 집안에서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이 되었던 존재는 아들이었을 것. 주씨 집안 핏줄이 아닌 영특한 아이는 홀로 엄마를 배려하며 장차 정말로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안겨주지만, 어른들의 잘못 때문에 결국은 건물 꼭대기에서 내던져져 목숨을 잃고 만다. 이로서 호정이 가지고 있던 가능성 모두는 닫혀버렸다. 어쩌면 그녀는 나이 먹어갈수록 아들에게 자신을 대입하는 한국 어머니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갈 수도 있었을 것. 그러나 잠자코 나이먹기를 기다리는 대신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바람을 피우고, 아들을 잃은 후에는 통곡한다. 호정으로 하여금 진짜 홀로서기를 하도록 몰아간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지운과의 섹스장면에서 그녀가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어딘가 작위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호정은 매력적이지만 일관성이나 설득력은 떨어지는 인물이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황정민이 연기한 영작 쪽이다. 영작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영화의 도입부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 운전을 하다 차도로 뛰어든 개를 치고 만 그는 우왕좌왕하다 전화에 대고 거짓말을 한다. 이 사건은 뒤에 일어날 엄청난 비극에 비하면 그저 뻔하고 사소한 복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좌우간 그는 그런 인간이다. 개를 치고도 담담할 수 있을 만큼 무자비한 남자는 절대로 되지 못하며 오히려 그게 잘못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 매사가 그런 식이다. 사회정의를 위해 헌신할 줄 아는 꽤 양심적인 변호사지만, 자기도 어린 애인과 놀아나는 형편에 아내가 ‘고삐리’와 바람났다고 화를 내는 어그러진 잣대의 소유자. 영작이라는 캐릭터가 현실적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결국 그가 애인과의 밀월여행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내뱉은 치명적인 거짓말은 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역겹지만 가련하고 동시에 한심한 남자의 초상을 영작은 그려내 보인다. 배신한 애인 연(백정림)이 그를 다정히 껴안아 주고, 아마도 오만정 다 떨어져 마주하는 것만으로 치가 떨릴 호정이 그래도 영작을 미워하지만은 않는 것처럼 비치는 이유도 그의 그런 면들 탓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영화의 라스트씬은 통쾌하기보다는 처절하다. 영작은 태연을 가장한 표정으로 호정에게 다가와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하지만 “아웃”이라는 한 마디로 거절당한다. 부지런히 대걸레질을 하는 문소리와 머쓱하게 물러서다 무대 위의 댄서처럼 양발을 따닥 부딪치는 황정민. 그들의 젊고 강인해 보이는 육체가 관객에게 전달하는 감흥은 안타까움이다. 어쨌든 이제는 둘 다 모두에게,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일만 남았기 때문에. 이처럼 <바람난 가족>에서 섹스보다 매력적인 것은 몸의 움직임 자체다. 특히 물구나무를 서고 자전거를 타고 양치질을 하고, 아이스바를 우둑우둑 씹으며 마지막에는 힘찬 걸레질로 남편을 아웃시켜 버리는 문소리의 몸은 어떤 대사나 트릭보다 솔직하고 건강한 느낌. 몸의 움직임과 반응들에는 거짓이 없으며, 그러므로 건강하다. 어쩌면 영화가 추구하는 솔직함이란 바로 이런 데 있을 것이다.
극장을 나와 바라본 세상이 이전과는 다른 색깔과 질감을 가지고 다가오게 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 라는 전제하에서 볼 때 <바람난 가족>은 잘 만든 작품이며 표방하고 있는 카피 그대로 충분히 문제적이다. 엔딩 크레딧이 오른 후 자리를 뜨는 관객들은 아마도 저마다 마음속에 담은, 보석 같은 교훈들을 비슷하게 곰씹어보고 있을 것. 거짓말하지 말자. 정공법으로 살자. 비겁과 위선은 싸구려 일탈보다 1만 배는 더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