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 영화를 소위 '예술 영화'로 치부하고 보기 전부터 위화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그건 명백히 한 면은 보고 다른 면은 보지 못한 처사다. 그의 작품들이 '예술'이라는 데에는 물론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영화 내내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위트와 개그가 흘러 넘치는 아주 재미있는 코미디라는 것 또한 우디 앨런의 영화세계를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오늘 소개하는 영화 <마이티 아프로디테>만 보더라도 이런 식이다. 차를 타고 가던 부부(우디 앨런과 헬레나 본햄 카터)는 말다툼을 시작한다. 이유인즉슨 함께 식사를 했던 스폰서가 아내를 바라보는 눈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 이 부부싸움의 현장을 간략히 중계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남편: 그 남자가 당신 보는 눈길 봤어? 벗은 몸을 상상하고 있더라니까. 아내: (한숨을 쉬며) 원래 눈빛이 그래요. 남편: (발끈하며) 아냐. 날 그렇게 봤으면 벌써 목이 날아갔을걸. 아니면 진하게 키스를 해주던가.
물론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뉴욕에 거주하는 유태인 지식인의 정체성이 강하게 배어 나오는 데다 유머도 다분히 영어식, 뉴욕식인 터라 다른 문화권에서 영화의 재미를 온전히 누리기는 쉽지 않다. 거기 더해 원래 우디 앨런의 영화들이 그다지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푸대접이 유난해서 극장에 간판 걸리는 일조차 희박하다. 몹시 유감스런 일. 1995년에 만든 <마이티 아프로디테>는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나 <스몰 타임 크룩스> 등을 제외한다면 그의 작품 중 가장 접해보기 용이한 영화에 속한다. 속사포 독설이 담고 있는 날카롭게 벼린 풍자대신 따뜻한 유머 감각을 채워 넣었다는 점에서 비교적 대중적인 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기도. 물론 대중적이라는 이야기가, 작품성과 대중성을 나누는 해묵은 이분법에 토대하고 있지 않다는 점만큼은 미리 이야기해두어야 할 것 같다.
<마이티 아프로디테>에서 가면과 마법사 풍 로브를 착용한 채 불쑥불쑥 등장하는 코러스들의 역할도 꼭 그런 식.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 이오카스테, 테베의 맹인 예언자를 비롯한 익숙한 고전 속 캐릭터들도 등장해 재미를 더한다. 이들은 "생모 찾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 여자랑 '하고' 싶은 거 아냐? 호기심은 언제나 파멸의 지름길일지어다"하는 식으로 갈팡질팡하는 레니를 조롱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해변 별장은 사지 말라구. 저당금과 해변 침식 때문에 고생만 해."와 같은 유용한 조언도 아울러 던져준다. 세련된 뉴요커들이 활보하는 뉴욕 거리에 스르르 출몰하는―물론 주인공 레니에게만 보이는 환상이긴 하지만―이들이 그 얼마나 웃긴지는 직접 봐야만 실감할 수 있을 것.
스포츠 기자인 레니(우디 앨런)와 큐레이터 아만다(헬레나 본햄 카터)는 뉴욕에 사는 전형적인 여피족 부부. 엄마가 되고는 싶지만 낳기는 싫은 아만다는 어느 날 아기를 입양하자는 제의를 한다. 한편 처음에는 반대하던 레니도 아기의 귀여움에 홀딱 반해 전형적인 팔불출 아버지로 거듭난다. 자라날수록 점점 더 잘생기고 똑똑해지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레니는 어느 날 갑자기 아이의 생모가 못 견디게 궁금해진다. 이렇게 훌륭한 아이를 낳은 엄마는 아마 굉장한 여자일 거라는 추측에서 비롯된 궁금증―혹은 지루한 결혼생활이 만들어낸 흑심―으로 생모를 찾아 나선 레니 앞에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귀엽고 똑똑한 맥스의 엄마는 <황홀한 구멍>, <조갯살> 등에서 열연한 포르노 배우이자 창녀인 린다 애쉬(미라 소비노)였기 때문.
괴상한 장식품들―예컨대 추가 움직이면서 두 마리의 돼지가 열심히 교미하는 시계―로 가득 찬 린다의 아파트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부터 이미 실신 직전이었던 레니는 아들의 생모에게 좀더 나은 삶을 찾아주고자 전전긍긍한다. 그러면서 섹시미 100%, 백치미는 200%의 그녀 매력에 조금씩 끌려들기 시작하는 이 남자, 결국은 코러스들의 준엄한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이상이 영화의 대략의 줄거리. 앵앵대는 목소리가 트레이드마크인 포르노 배우 린다를 연기한 미라 소비노는 이 영화로 그 해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뉴욕 비평가협회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다.
사실 <마이티 아프로디테>를 보고 실제 우디 앨런의 프로필을 떠올려보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 온갖 매스컴을 요란하게 장식했던 바로 그 '순이 사건'말이다. 순이는 우디 앨런의 전동거녀 미아 패로우가 입양한 딸이었고, 따라서 우디 앨런은 순이의 남편이자 유사 양아버지인 셈. 우디 앨런은 이 영화가 '입양'에 대한 스스로의 경험에 토대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레니와 린다가 재회하는 <마이티 아프로디테>의 라스트씬은 그런 면에서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클 것.
시간이 흘러 린다는 비로소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그러나 어쩌랴. 실제로 그 애는 린다와 레니가 딱 한 번 동침했을 때 생긴 레니의 아이인 것을. 몇 년 후 우연히 마주친 그들은 각자의 아이―맥스의 생모는 사실 린다이고,린다가 데리고 있던 아이는 언급했듯 레니의 아이다―의 손을 잡은 채로 어색하고, 또 행복한 인사를 나눈 채 다시 스쳐간다. 두 사람은 서로가 가지고 있는 비밀을 결코 상대에게 털어놓지 않으며, 그리하여 진실은 영원히 묻혀진다. 멋들어진 운명의 복수.
전작 <브로드웨이를 쏴라>에서 누구나―심지어 무식하고 난폭한 갱일지라도―예술가가 될 수 있음을 유머러스하게 설파했던 우디 앨런. 그가 <마이티 아프로디테>에서 면죄부를 주는 대상은 사랑이다. 어떤 환경에서든, 대상이 누구든 모든 행복은 사람이 만나 사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생겨나는 것.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 누구든 결백하리. 그리고 이 매력적인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관객은 저 대책없게까지 느껴지는 사랑찬가에 진심으로 찬동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