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터미네이터3>는 노인 장수만세 영화였다. 12년 만에 돌아온 T3를 심히 심기 불편하게 봤던 이들이 영화를 빗대 노인학대라 칭하며 <터미네이터3>를 학대했지만, 우리의 아놀드 형님의 위풍당당한 볼록볼록 엠보싱형 근육질 풍채는 환갑잔치를 얼마 안 남긴 초로의 신사의 몸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 옛날 그 시절 그대로였다. 액션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수장인 제임스 카메론을 대신해 영화를 맡았던 조나단 모스토우는 여러 가지로 자신이 악조건에 처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바로 이 점을 십분 활용하는 전략을 택해 단순하지만 미련하지 않은 우직한 전술을 아놀드를 통해 보여준다.
<터미네이터3>는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며 기기묘묘함의 품세들로 정교하게 프레임을 꽉 채운 요즘의 영화와는 달리 아주 아날로그적으로 액션 장면을 연출한다. CG를 덧씌우며 매무새를 잡은 근사한 피사체들와 풍광들이 지천에 널린 현재의 상황에서는 인간의 육체야말로 경이로운 스펙터클 그 자체다. 그러기에 구형 T-800(아놀드 슈왈츠네거)과 신형 T-X(크리스타나 로켄)가 벌이는 막무가내식의 대결 신은 꽤나 파워풀한 쾌감을 안겨다준다.
특히, 존 코너(닉 스탈)를 지키고자 아놀드가 T-X가 운전하는 크레인에 당당당 매달려 대로변에 위치한 건물을 그냥 온몸으로 들이 받으며 초토화시키는 장면과 화장실에서 서로 패대기치며 죽어라 싸우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경량급의 복싱선수가 현란한 풋 워크를 선보이며 잽을 비롯한 정교한 기술을 날릴 때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맛이 아닌, 뒤뚱뒤뚱거리며 기회를 노렸다 묵직한 한 방을 내질러 상대를 격퇴시키는 타이슨의 파괴력을 보는 것과 같은 그 느낌.
영화는 어찌할 도리 없이 전편과 비교되어야만 하는 숙명에 처해 있기에 아쉽지만 부족한 면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우선, 원 투편에 비해 이번 작품에는 긴장감이나 절박함이 거세돼 있다. 액션은 물론이거니와 드라마의 아찔아찔한 위기감을 촉발시켰던 인물 사라 코너(린다 헤밀턴)의 부재가 가장 큰 이유이다. 그녀와 제임스 카메론 없이 작업된 <터미네이터3>는 차 떼고 포 떼고 둔 장기와 마찬가지다. 영화가 싱겁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전작의 T-1000에 이어 등장한 여성(의 외피를 한) 사이보그 T-X의 존재 또한 여기에 한 공로한 캐릭터다.
헝클어진 긴 머리를 스튜어디스처럼 단정하게 붙들어매고 싸울 태세를 깔끔하게 준비한 T-X는 초반 알몸으로 등장해 아찔한 등짝과 엉덩이를 보여 준 것 외에는 특별히 이렇다할 볼 거리와 역할을 던져주지도 보여주지도 못한다. 최후를 맞이하는 T-X의 불쌍스런 모습 역시 보는 필자가 민망해질 정도로 너무 허망하다. 얼굴 표정은 말할 것도 없고 귀부터 시작해 헤어스타일까지 온 몸이 소름덩어리처럼 느껴졌던 <터미네이터2>의 T-1000이 사무치도록 그리울 뿐이다.
제임스 카메론과 린다 헤밀턴의 공백이 예상했던 대로 여실히 드러난 <터미네이터3>는 그 구멍을 메우고자 이야기를 구부려뜨리고, 전작의 인상 깊은 장면들을 빌려다 쓰고,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아놀드의 유머스러한 위트로 대체한다. 부시고 뽀개고 박살내는 액션에 중점을 둔 채 말이다. 결국, T3를 맛나게 즐기게 위해서는 전작들을 잊고 보는 것이 여러 가지로 편하다. 하지만 남녀가 진한 관계까지 다 갖고 나선 이제부터는 골방에서 이뤄진 창대한 침실노동을 모조리 잊고 가벼운 친구사이로서만 만나자면, 어디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