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사무라이영화 한편이 서울 한복판에 걸렸다.
사무라이가 웃기다니! 그건 일본열도의 전 국민을 '웃기는 놈'으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사무라이하면 자기내공과 무술연마를 위해서 전국을 떠돌면서 고수들과 한판의 승부를 통해서 자신을 갈고 닦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닌가? 아마도 '미야모토 무사시'같은 사람을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할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일본의 영웅 아닌가?
그런 사무라이들을 웃기는 놈으로 만든다? 어떤 웃기는 놈이 만든 것이기에... 진짜로 영화는 시종 사람들을 허기지도록 웃게 한다. 오히려 무거운 표정으로 일관하는 풍운아 '카자마츠리'가 안되어 보일 정도로 모두가 유쾌한 사람들이다. 특히 성주의 아들로 집의 가보로 내려오는 칼을 '카자마츠리'에게서 빼앗어 오기 위해 집을 떠나는 천방지축 '헤이지로'의 모습은 비장해서 경쾌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헤이지로에게 칼을 쓰지 않게 하기 위해서 돌 던지는 비법을 전수하려는 칼의 달인인 '한베이'의 모습은 심각하기에 오히려 우스꽝스럽다.
이 만화의 주인공들은 상당한 유머를 가진 웃기는 놈이다.
주인공인 '대도오'를 보자. 엉덩이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부엌칼 같은 커다란 칼이 그가 가진 무기의 전부이다. 표정이 없고 싸가지 없는 말투와 행동거지는 안하무인이지만, 싸움에 철학 같은 것, 예의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칼질도 무아지경에 이르니 그만한 싸움꾼이 없다.
계집애 같은 '매봉옥'은 '대도오'를 만나고 나서 남자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다. 무식하기 이를 때 없는 '반효'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하고, 비밀의 사나이 '노대'의 꿍꿍이 또한 궁금하다.(현재 연재 중임으로 그의 존재는 아직까지 설명되지 않았다.)
서로 다른 문화의 영역에서 화제작인 이 두 편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화두이다.
첫째, 이 둘의 닮은 점은 '남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남자에겐 남자만의 세계가 있다고 혹자는 말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혹시 힘 겨루기나 의리로 가장된 편먹기가 아닐까?
어린아이들의 주먹싸움부터 어른들의 피터지는 땅따먹기까지 남자들의 세계에서 싸움을 빼놓고 얘기할 것은 별로 없다. 내가 죽지 않으려면 남을 죽여라. 혹은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 끝내지 못한다. 평화가 다 무엇이냐. 빌어먹을....
하지만 '남자'의 이야기라지만 이 둘의 방식은 다르다.
[사무라이 픽션]에서 싸움은 희화적이다.
죽은 자의 얼굴조차 미소를 띄고 있는 것 같다.
애시당초 상대가 되지 않는 자와 칼을 맞대는 것은 모욕적이고 그나마 싸움이 될 것 같은 자는 이제 칼을 들지 않으려 한다. 그에게 자꾸 싸움을 거는 '카자마츠리'의 모습은 신바람이 난 아이의 모습 같다.
그러나 [남자이야기]의 싸움은 처절하다.
하루 하루가 총알받이처럼 목숨을 버리는 일개 졸병들의 싸움에서는 이유도 명분도 없다. 숨막히는 매일의 전투 속에서 그들은 왜 서로 죽여야 하지? 라는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는 방식이 되었고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삶이 되었다.
"싸움의 두 형태, 생존 투쟁과 인정 투쟁, 아름답고 우아한 어떠한 명분도 본질적으로 내포된 그것의 처절함을 남김없이 감싸진 못한다. 더욱이 서로의 생명을 유린하는 전쟁에선 그 포악함과 처절함이 막무가내로 드러나 버리고 만다. 우아함, 품위, 사랑, 그딴 건 개에게나 줘버려라!"
(사족으로, 남자들의 세계에서 여자라는 것은 너무나도 미미한 존재이다. 가끔 구원의 여신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천사같은 존재일 수도 있으나, 여신이나 천사에서는 인간의 뜨거운 피와 눈물을 느낄 수 없다. 그러므로 여자가 유일하게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은 그녀가 남자보다 더욱더 독하게 세상을 살아갈 때뿐이다. 남자만큼의 힘과 완전히 여성성 자체를 보이지 않는 여자라야 그들의 세상에서 인간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닮은 점은 영화는 만화를, 만화는 영화를 복제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만화의 한 칸은 영화의 한 컷과 같다. 만화의 정지된 그림은 영화 속의 스틸사진 같다. 최첨단 디지털의 사용으로 독특하고 역동적인 화면을 얻어 낸 [사무라이 픽션]은 뮤직비디오의 영상처럼 화려하고 이미지 적이다. 그리고 [남자이야기]에서 역시 이미지를 극대화한 그림들을 자주 보게 된다. 비유적인 묘사에 열중하거나, 크라이막스에서 화면의 절단으로 영화 속의 슬로우를 경험하게 한다.
또한 창작의 고통 속에 놓이는 작가의 고민도 같을 것이요, 영화가 여러 개봉관을 잡아 관객의 머리수를 늘리고 싶은 것은, 만화가가 한 권의 책이라도 더 찍고 싶어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각각이 책임져야 할 사회적, 정치적 의무에서도 이 둘은 닮아 있다.
이제는 곳곳에서 영화와 만화를 만난다.
다른 어느 형태보다 가장 쌍둥이처럼 닮은 그들이 만날 곳은 예술이라는 거대한 모태의 품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들이 찾아가야 하는 최선의 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