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시사가 끝난 후 서울극장 앞의 한 이탈리아 식당에서 <청풍명월>의 조재현, 그리고 김보경과 조우했다. <친구>와 <아 유 레디?>를 거쳐 <청풍명월>에서는 독기 어린 무사로 변신한 김보경은 가까이서 접하니 생각보다 훨씬 더 가냘픈 인상. 질문 하나하나에 나직하게, 그러나 시종일관 확실한 태도로 답하는 모습에서 침착하고 강단 있는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평소 농담을 즐기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는 조재현은 어긋난 운명에 놓인 무사의 비감(悲感)을 떨쳐버리려는 듯 쾌활한 모습. 아니 실은 고백하자면, 어리버리 기자는 인터뷰 내내 몇 번이나 놀림을 당해 쓰디쓴 패배감을 곰씹어야 했다.
도입부부터 어택은 시작된다. "오늘 처음으로 완성작을 확인한 걸로 아는데, 허심탄회한 감회 한 마디 부탁한다."는 질문에 조재현과 김보경은 눈을 뚱그렇게 뜬 채로 바라보기만 한다. 싱싱하지 않은 생선을 볼 때 혹은 "한국말 못해요"의 표정. 당황한 기자, 다시 한 번 답변을 채근하자 갑자기 조재현은 웃음을 터뜨린다. "우하하하하! 화났어." 크으... 이어지는 '진짜 답변'에서 두 배우는 모두 배우가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즐겁게 볼 수 있었다며 영화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
Q: 보통 <청풍명월>하면 최민수와 조재현, 카리스마와 카리스마의 대결이라는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최민수와의 작업은 어땠나?
조재현: 원래 친한 사이라 예상만큼 불꽃튀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고. 우린 서로를 좋아할 뿐 아니라 아끼고 존중한다. 분위기는 참 좋았지만 촬영이 들어갔을 때는 당연히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다.
Q: 김보경씨는 쟁쟁한 선배배우들과 함께 작업했다. 감회가 어땠나? 어째 좀 바보스런 표현이지만 '무섭지는' 않던가?
김보경: 두 분이 계셔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든든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영감이 될 수 있는 배우들이니까. 그렇지만 고백하자면 가끔 긴장도 되고 해서 '좀 안계셔줬음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있다. 많은 영화에 출연해보지는 않았지만, <청풍명월>에 임하는 각오와 고민은 내게 남달랐다. 그리고 나를 그렇게 만든 건 아마도 두 선배님의 저력인 것 같다.
Q: 영화에서 자객으로 분한 모습을 보고 상당히 독기 어린 분이 아닐까 했는데, 실제로 보니 한들한들 연약하다. 이번 영화에서도 노출씬이나 검술을 비롯 힘든 연기가 많고, 이전작(<친구>, <아 유 레디?>)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굳이 힘든 행보를 택해온 이유가 있는가?
김보경: 했던 거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그리고 <청풍명월>은 시나리오를 보니 정말 안 할 수 없더라. 내 역이 사실상 그렇게 비중이 큰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때 조재현 갑자기 한 마디. "남성적인 성향이 강한 것 같다. 보기에는 가냘퍼 보이는데 내면세계는 남자의...."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김보경)
Q: 아, 그거 마침 물어보려고 했었다. 조재현이 보는 김보경은 어떤가?
조재현: 여배우는 내 생각엔 백치같은 느낌도 중요하고... 아니 남자배우도 그렇지만, 섹시한 면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보경은 백치 같으면서도 섹시한 면이 있다.
Q: ('백치같다'는 말에 혼자 놀란 기자, 김보경에게 질문을 돌린다)반격의 기회를 주겠다. 김보경이 보는 조재현은?
김보경: 아니 반격이라니... 전 감사한데.
조재현: 거 참 성격 이상한 사람이네. 칭찬입니다 칭찬. (박장대소하는 김보경. 궁지에 몰린 기자는 '언제부터 백치라는 말이 칭찬으로 통용된 거지'라고 홀로 궁시렁 댄다. 손발 척척 맞는 두 배우의 모습이 뭐 꽤 보기 좋긴 했지만.)
김보경: 모두들 조재현 선배님에 대해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나도 선배님이 좋다. 연기에 대해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촬영 중에 나도 어서 이 선배님들처럼 진짜 배우가 되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한 적도 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청풍명월'은 지환(최민수)과 규엽(조재현)이 꿈꾸는 태평성대를 일컫는다. 그리고 누구나 마음 속에 그려보았을 아름다운 세상을, 바로 검을 쥔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가겠다는 것이 이 젊은 무인들의 빛나는 이상. 그러나 잔혹한 운명에 얽혀든 둘은 피눈물을 삼키며 서로에게 칼끝을 들이댈 수밖에 없다. 두 무사 중 보다 전형적인 영웅에 가까운 캐릭터는 지환 쪽. 반면에 친구와 스승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에 짐짓 차갑게 굳어버린 외피로 감정을 감추는 규엽은 좀더 인간적이다. 규엽과 지환을 각각 조재현과 최민수가 연기했다는 건 누가 봐도 어울리는 선택. <피아노>나 <눈사람> 등 TV 드라마에서 주로 지순한 남자를 연기했던 조재현은 스크린으로 오면 갑자기 '나쁜 남자'가 된다. 그리고 그 남자의 '나쁨'은 늘 일그러진 분노와 슬픔에서 유래했었다.
Q: <청풍명월>로 조재현의 새로운 모습을 본 것 같다. 실제로 사극은 처음인걸로 안다. 그렇지만 그간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연기해 온 아웃사이더라는 점에서는 닮은 점이 많은데.
조재현: 질문에 공감한다. 그러나 시대물이라고 해서 특별히 어려운 건 없었다. 고증보다는 지금의 정서를 토대로 그 시대에 접근했고,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청풍명월>은 조선시대, 그 중에서도 인조반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엇갈린 운명에 대한 얼마든지 지금 이 시대와도 만날 수 있다. 광주항쟁 때 절친한 친구였던 운동권 학생과 공수부대원이 마주친다든지.
Q. 연기할 때 특별히 염두에 둔 부분은?
조재현: 중요한 건, 나한테 최민수씨 역할이 맡겨졌으면 안했으리라는 거다. 각자 어울리는 역은 따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특별히 작품을 분석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 게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연기는 수학공식이 아니다. 강박적으로 매이거나 불필요한 힘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지나친 분석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느끼는 대로, 몸에서 나오는 대로 보여주려 했다.
Q: 여주인공 시영이 죽으면서 "미안해요."라는 말을 남기더라. 그 사과의 의미는 뭔가?
조재현: 맞아. 나도 그거 궁금했어.
김보경: 원래는 그 부분에 대사가 없었다. 찍으면서 뭔가 한 마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것저것 생각을 해봤다. 사랑해요, 배고파요(웃음), 나 땜에 다 망쳤군요... 장난스럽게 한 마디씩들 하다 보니까 결국 "미안해요"가 가장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말로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나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그리고 그 말 한 마디에는 엇갈린 운명에 놓인 두 사람이 느끼는 깊고 넒은 감정의 흐름이 모두 담겨있다. 또 원래 사랑하면 미안한 거 아닌가.
조재현: 크... 사랑을 안 해 보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지.
김보경: (그저 웃음)
Q: 뜬금 없는 질문 하나 해 보자. 종류를 불문하고 가장 싫어하는 게 있다면 무엇?
조재현: 있기 싫은 자리에 있는 것. 의무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 (잔뜩 쫄은 기자가 "왠지 뼈가 있는 듯한 말투..."라고 웅얼거리자)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 허 참 진짜 이상한 성격이네(세 번째 어택).
김보경: 저는 게으른 것, 나태한 것.
Q: 참, 영화에 나오는 소품 중 물고기 목걸이가 인상적이더라. 그게 연어던가?
조재현: 그렇다. 둘의 우정을 상징하는 연결고리로 등장한 거다.
Q: 나중에 둘이 물 속에서 숨 오래 참기 내기를 하는 장면에서 지환이 "내가 너보다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건 숨이 멎어도 날 끌어올려 줄 네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다. 하필 '회귀'를 상징하는 연어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던 건 결국 행운이든 불행이든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을 상징한 건가. "넌 언젠가 나에게로 돌아올 거야." 뭐 이런 느낌?
조재현: 아, 좋은 해석. 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갑자기 팔을 걷어 보여주며) 소름이 쫙 돋았어. (갑자기 기자가 가지고 있던 노트를 넘겨다보며)참 메모도 잘하시고, 정말 학구적인 분이다. (궁금해서 물었다 바보취급 당한 기자, 갑자기 더워진다)
Q: 차기작 계획이 궁금하다.
조재현: <청풍명월> 개봉 때문에 좀 늦춰진 <목포는 항구다> 촬영에 곧 들어간다. 오늘내일 하는 중이다.
김보경: 있긴 한데 (주저하며) 아직은 구체적으로 말할 단계가 아닌 것 같다.
Q: 앞으로 특별히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감독이 있는가?
조재현: 기회가 된다면 임권택 감독님과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 한국 영화의 대표적인 거장이신데, 그 분의 작품에 출연해보지 못해 아쉽다.
김보경: 아직 특별히 그런 선호를 가질 만큼 영화를 많이 해보지 않아서.. 최대한 많은 분들을 만나고 다양하게 배워가는 게 일차적인 목표다.
취재: 임지은
촬영: 이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