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화재가 한참 매스컴을 달구며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당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말이 있었다. “남의 백화점, 내 지하철.” 물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지하철 화제라는 두 참사를 비교해 하는 얘기다. 사고 자체의 끔찍함이나 유가족들의 아픔이야 서로 비교해 경중을 따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고 또 그래서도 안될 일이지만, 참사의 무대가 하필 지하철이었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정상’ 훨씬 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그 안에 있었을 수 있다, 심지어 나 자신도. 비정하지만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후, 살아서 뉴스에 비친 사고현장을 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안도하고 나서야 비극을 피부로 느끼게 되는 게 인간이다. 영화의 관객이라고 다를 리 없다.
장도준 형사(김석훈)은 테러범 강기택(박상민)을 추적하는 중이다. 강기택은 전 국가 정보부의 최정예 비밀요원으로, 정부로부터 축출 당한 후 요인을 암살하고 수배중인 인물. 동시에 그는 장도준의 동료이자 연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신임 시장단의 지하철 시찰이 있던 날 강기택은 지하철을 탈취해 대형 테러를 감행하려 한다. 이 사실을 도준에게 알린 것은 그를 일편단심 사랑하는 소매치기 아가씨 인경(배두나). 그리하여 인경을 비롯한 승객들을 인질로 삼은 기택과 무슨 수를 써서든 폭탄이 장치된 지하철을 멈추게 하려는 도준, 두 숙적 사이의 운명적인 대결이 시작된다.
<튜브>를 정의할 수 있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 롤러코스터 같은 액션이 가져다주는 시각적 즐거움과 흘러 넘치는 낭만주의다. 그리고 두 요소에서 관객은 모두 명징한 기시감을 겪는다. 인물 구도와 액션은 <스피드>, 충성한 국가로부터 배신당한 테러리스트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더 록>, 한편 쓸쓸한 눈빛으로 부유하는 김석훈이나 개봉 전부터 유명해진 배두나의 나레이션(“사는 게 뭐 별 건가? 달콤한 기억 하나면 되지.”)은 아무래도 홍콩 느와르와 왕가위의 교배 같다. 실제로 감독은 여러 편의 헐리우드 영화를 보며 벤치마킹을 시도했다는 점을 스스로 언급하기도.
<쉬리>의 조감독이기도 했던 백운학 감독은 상업영화에 대한 고집이 남달라 보인다. “철저히 쳐낼 건 쳐내고” 당초의 목표였던 오락영화로서의 재미에 크게 치중한 탓에 <튜브>는 스펙터클과 평면적 인물이라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얻었다. 확실히 거리낌없이 영화의 속도감에 몸을 내맡길 수 있다는 것은 엔터테인먼트로서 이 영화의 커다란 미덕.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말을 악몽의 꼬리표와 동일시하게 만들어버린 최근의 ‘대작’들이 줄줄이 실패를 겪은 후라선지 <튜브>가 보여주는 모종의 올곧음은 오히려 미덥다.
그러나 드라마가 취약하다는 부분만큼은 역시 부인하기 힘들 것. 태생부터 ‘엔터테인먼트’임을 인정하면서도 드라마 전개의 허술함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튜브>가 그 토대 자체를 상당 부분 인물간의 얽히고 설킨 관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장도준과 강기택이 대립하게 된 이유는 개인적인 복수심 때문이다. 도준은 극중에서 형사로 등장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가 목숨을 걸고 지하철 안으로 뛰어드는 이유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로 보이지는 않는다. 둘은 각기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이라는 아픈 과거에 얽매여 있으며, 장도준에게는 비록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음에 분명한 인경이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이, 강기택에게는 국가에 대한 복수심이 각기 동기로써 한 가지씩 추가된다.
인물들 간의 감정의 실타래는 <튜브>에서 지하철 액션만큼이나 중요한 한 축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자, 여기까지.”하는 식으로 인물들에 딸린 스토리들을 상당부분 쳐낸다. 오락영화의 본분에 너무 치중하려 한 나머지 스스로 운신의 폭을 가두는 결과를 낳았고, 그 때문에 절박하고 숨가쁜 액션들은 가끔 그 존립근거를 상실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얘기. 그러나 <튜브>의 비장하되 치밀하지 못한 감상주의는 나름대로 매력적이며, 몇몇 황당하게 느껴지는 장면들도 영화를 보는 재미를 해칠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다. 배우들의 캐스팅도 나쁘지 않은 편. 자칫하다간 평면적이고 붕 뜨는 캐릭터가 되기 쉬운 송인경 역에 배두나를 캐스팅한 것은 특히 다행스런 선택이라 할 만 하다. 우여곡절 끝에 개봉하는 <튜브>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과연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악몽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들을 품어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일 것. 여러 면면들을 종합해 볼 때, “가능하다”에 한 표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