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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하고 귀여운, 진부하고 흐뭇한
성질 죽이기 | 2003년 6월 4일 수요일 | 임지은 이메일

<성질 죽이기>가 첫 눈에 흥미로운 이유는 역시 배우 때문이다. 우선 <해피 길모어>, <웨딩 싱어>, <미스터 디즈>로 이어지는 루즈한 코미디 영화들로 하나의 브랜드가 된 아담 샌들러. 그렇다면 ‘샌들러 표’의 정의는 대략 이쯤 될 것 같다. “관객, 특히 미국 관객들에게는 더없이 사랑 받지만 평론가들과는 결코 안 친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선한 눈과 살짝 튀어나온 토끼 이로 친근하게 웃는 모습 뒤에 억눌린 분노와 적대감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해 준 건 얼마 전 개봉했던 <펀치 드렁크 러브>였다. 아니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왜 몰랐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러나 이 남자에 한해서는 결코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었던 분노가 몸 안에 견고한 층을 이루며 켜켜이 쌓여갔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에는 거죽을 뚫고 나와 몸 전체를 삼켜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는 잭 니콜슨. 아카데미 12회 노미네이트에 3회 수상의 신화에 빛나는 남자. <배트맨>에서 보여준 사악한 미소가 됐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강박증 환자가 됐든 잭 니콜슨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짧은 단어는 카리스마다. 뭐 <차이나타운>이나 <샤이닝>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러고 보니 <취화선>이 칸 경쟁부문에 진출하고 난 직후 최민식은 한 인터뷰에서 잭 니콜슨을 “우리 니콜슨 형님”라고 불렀다. 니콜슨 형님... 말 그대로. “너 소냐? 나 최영의야.”하고는 번개 같이 소뿔을 가라데로 내리쳐 부러뜨렸다는 최배달이 <넘버 3>의 송강호를 위시한 건달들의 우상이라면, 잭 니콜슨은 배우들, 혹은 배우 지망생들의 ‘엉아’ 임에 분명하다.

사설이 길었지만, 여튼 간에 서로 다른 차원에 거주하는 것만 같은―뭐 꼭 우열을 가리자는 의미는 아니지만―샌들러와 니콜슨, 두 배우의 만남은 발상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화학작용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담 샌들러의 세계로 잭 니콜슨이 뛰어들었다. 그 반대가 아니라. <성질 죽이기>는 온건하고, 약간 게으르지만 흐뭇하고 귀엽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잘 만든 아담 샌들러 영화’다. 아담 샌들러의 베스트, 잭 니콜슨의 워스트라고 이 영화를 정의한 평자도 있거니와, 확실히 잭 니콜슨 팬의 입장이라면 <성질 죽이기>는 불만스런 결과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알고 보니 두 남자가 꽤 궁합이 잘 맞는 짝패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좋아하는 여자애와 막 뽀뽀를 하려던 순간, 심술 맞은 친구에 의해 바지가 내려지는 가공할 만행을 당한 데이브 버즈닉(아담 샌들러)은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기막힌 일을 당해도 속앓이만 할 뿐 변변히 화 한 번 못내는 소심한 남자로 성장한 데이브는 어느 날 일이 꼬이다 못해 법정에까지 서게 된다. “헤드셋 좀 가져다 달라”고 극히 점잖게 부탁했을 뿐인데 승무원은 스턴건으로 공격하질 않나, 판사는 ‘성질을 죽이는’ 치료를 받던지 1년 간 감방에서 썩던지 양자택일하란다. 하여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심리치료사를 찾아간 데이브는 다시 한 번 경악한다. 비행기 안에서 모든 사고를 조장한 원흉, 그것이 저명한 심리치료사 버디 라이델 박사(잭 니콜슨)의 정체였기 때문.

아닌 게 아니라 치료해준답시고 무작정 쳐들어와서는 침대 옆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달걀은 반숙만 먹는댔잖아!”라는 불호령과 함께 계란 접시를 목이라도 날려버릴 기세로 내던지는 이 사이코 박사와 부대끼다가는 성질 죽이기는커녕 없던 성질도 생길 판이다. 그러나 화를 가라앉히는 주문 “구스 프라바”에는 정녕 마법의 힘이 깃들어 있었던가. 데이브는 어느 틈에 박사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고 만다. 좀 치졸하긴 하지만 어린 시절 바지를 내렸던 숙적(존 C. 라일리)을 찾아 멋들어지게 복수도 하고, 이젠 좀 뭐가 풀려가려나 싶었는데 바로 그 시점, 못된 박사는 다시 한 번 뒤통수를 친다. “잠시 냉각기를 가져” 어쩌구 하며 생각해 주는 척 하더니 아리땁고 발랄한 여자친구(마리사 토메이)를 송두리째 가로채려 하는 것. 제 아무리 순둥이 데이브지만, 이젠 인내도 한계에 달했다.

“날 바보취급 하도록 내버려두는 자신에게 화가 났었다”는 말미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 자기 감정에 솔직할 줄 몰랐던 한 남자의 성장담이면서도 생생한 감정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담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이 영화의 한계일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성질 죽이기>가 주는 웃음은 의외로 캐릭터의 변화 자체보다는 상황들에서 온다. 예컨대 잔뜩 얼굴 찌푸린 채 박사의 명령대로 “I feel pretty(<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서 마리아가 사랑의 행복감에 들떠 부르는 노래)"를 노래하던 데이브는 어느 틈엔가 노래 속에 완전히 몰입해 버리고 만다. 아 그래, 케세라세라. 좋은 게 좋은 거지. 실은 상당 부분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만―게다가 막판에 밝혀지는 ‘음모’도 전혀 치밀하지 못하다―, 관객은 영화의 안일하지만 귀여운 눈속임에 선뜻 넘어가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유는 첫째, 두 남자의 대책 없는 낙천성이 밉지 않은 탓일 거고, 두 번째로 나 자신의 마음속에도 도사리고 있던 은밀한 욕망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쓰리고 아픈 희생을 감내하지 않고도 좀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내 마음속의 욕심들.

<성질 죽이기>는 미국에서 2주 간 박스 오피스 정상을 지켰고, 역대 4월 개봉작 중 최고의 흥행 기록을 수립했다. 다분히 미국적인 요소들이 흘러 넘치는 영화라 우리 관객은 그 안에 포진해 있는 웃음의 실마리들을 채 끄집어내지 못할 수도 있겠다. 한편 제 3자 입장에서는 이미 지루하게도 비치는 ‘뉴욕 송가’가 다소 고깝게 비칠 여지도 충분하고. 어쨌든 화려한 조연과 카메오들은 영화의 또 다른 볼거리. 존 터투로, 헤더 그레이엄, 루이스 구즈만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선뜻 망가져 주는 데다, 우디 해럴슨의 파격적인 드랙퀸 변신은 눈여겨볼 만 하다. 또 한 성깔 하기로 유명한 테니스 스타 존 매켄로를 비롯한 ‘성질 더러운’ 유명인들이 실제로 분노를 관리하는 기술을 전수 받기 위해 라이델 박사의 상담실을 찾는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안일하지만 귀여운, 진부하지만 꽤 흐뭇한. <성질 죽이기>에는 그 정도의 수사가 어울린다.

1 )
ejin4rang
너무 진부하다   
2008-10-16 10:0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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