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카드> 도입부에 깔리는 양동근의 나레이션은 얼핏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이 씹어뱉던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땅덩어리 X만한 대한민국 형사는 발로 뛰는 거야. 발로.” 두 영화가 다루고 있는 시대 사이에는 15년 이상의 간극이 도사리고 있지만, 적어도 땅덩어리 X만한 대한민국 형사들 삶에는 그다지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한번쯤은 시원스레 앞서 달려보고도 싶으련만, 그들은 언제나 숨이 턱에 차도록 범인 뒤를 쫓고 또 쫓아야 한다. 그러나 뛰어봤자 벼룩이란다. 왜? “대한민국은 삼면이 바다고, 위로는 육십만 대군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뒤집어 말하면 바다가 넘실거리고 삼팔선이 보일 때까지 날이 밝고 별이 뜨도록 뛰는 것 외엔 도리 없다는 얘기. 꽤나 씁쓸한 유머다.
사실 조폭 못지 않게 인상 더럽고, 잠복근무하다 한길에서 짜장면을 시켜먹는 <와일드 카드>의 형사들은 트렌치 코트 자락 날리며 멋들어지게 총을 겨누는 ‘영화식 형사’들의 모습과는 판이하며, 오히려 현실세계의 형사에 훨씬 근접해있다. 일례로 새내기 형사 양동근은 상관에게 “총은 쏘라고 있는 게 아니라 범인한테 던져서 맞추라고 있는 것”이라는 호통을 듣는다. 거기 더해 퍽치기 계의 살아있는 신화 도상춘을 비롯, 정보원 격의 범죄자들과 은밀히 모의하는 모습에서 누가 경찰이고 누가 범죄자인지 한 눈에 가려내기는 힘들어 보인다.
형사들의 삶에 대한 손에 잡힐 듯한 묘사와 꽤 적재적소에 배치된 유머가 이 영화의 두드러지는 장점이라면, 가장 큰 단점은 형사 이외의 캐릭터들에 있다. 사실 형사들과 ‘퍽치기 계의 전설’ 도상춘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조연급 인물들에게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입체성이 없다. 퍽치기범은 매력도, 형사와 한 판 맞장 뜰 만한 위력―어디까지나 영화를 끌고 가는 캐릭터의 힘이라는 측면에서―도 전혀 없이 그저 악랄하기만 하며, 여성에 대한 묘사는 전혀 동의할 수 없을 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둘 중 더 문제가 되는 부분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하겠다. 여성에 대한 묘사가 잘못되었다거나 제대로 된 여성캐릭터가 없다, 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하고 싶은 이유는 <와일드 카드>가 남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 영화의 모든 단점―혹은 해악이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는 부분들―들이 이 왜곡을 중심으로 서로 얽혀있는 탓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형사들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표정으로 씹어뱉는다. “강간보다 퍽치기가 더 나빠.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당하게 되니까.” 이 대사는 악랄하기 그지없는 퍽치기범을 뒤쫓던 형사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며, 당시의 상황에 힘입어 나름대로 관객의 공감을 얻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죄의 경중을 결정하는가? 그리고 대사 자체보다 더욱 불쾌한 것은 “퍽치기범이 더 나쁨”을 관객에게 설득하기 위해 영화 전후에 심어놓은 장치들이다.
퍽치기범들의 얼굴을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은 이들에게 강간을 당한 ‘술집여자’(영화 속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하고 있으므로 마음에 안드는 호칭이기는 하나 그렇게 받아들이고, 또 부를 수밖에 없다)다. 이 여성은 영화 속에서 강간 피해자로서보다는 그저 ‘목격자’로 기능하는데, 강간을 당하는 상황에서부터 경찰서로 달려와 형사들에게 욕을 퍼붓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묘사된 수준이 그야말로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강간범-이자 퍽치기범-들은 여자가 반항하자 누운 등뒤에 범행도구로 사용되었던 쇠구슬을 집어넣는다. 여자는 쇠구슬 때문에 너무 아프고 배긴 나머지 “차라리 그냥 하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마치 스스로 자초한 것 같은 이상한 상황 속에서 강간을 당하고 난 여자는 경찰서로 달려와 걸쭉하게 욕을 퍼붓는다. “책임자 나와! 술집년은 사람도 아니냐?” 그 뒤에 이어지는 형사들의 “퍽치기는 강간보다 나빠”라는 대사를 덤덤히 들어 넘기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한편 퍽치기범들과 동석해 술을 마시다 살해당하는 두 명의 여자 역시 마찬가지. 여자들―첫 눈에 보기에도 화려한 그녀들과 앞서의 ‘술집 여자’는 의도인지 외양상 꽤 닮아있다―이 살해된 가장 직접적인 동기는 화장실에서 “쟤들 어째 좀 촌스럽지 않냐?”며 범인들의 험담을 했기 때문이고, 대화를 들어버린 범인들은 주저 없이 여자들을 다음 범행 대상으로 낙인찍는다. “그렇게 따지면 교회 가다 어이없이 당한 아저씨가 더 불쌍한 거 아니냐”라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맞다. 바로 그게 문제다.
<와일드 카드>는 성급하게 죄의 경중, 불쌍한 피해자와 덜 불쌍한 피해자의 경계를 그으려 하며, 스스로 “그냥 하라”는 말을 내뱉고 만 강간 피해자가 경찰서에서 걸쭉하게 욕을 퍼붓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상한 면죄부를 발행한다. (사실 이와 비슷한 실제상황―피해자가 스스로 강간을 ‘용인하도록’ 몰아가는 것―에 대해 필자는 들은 적이 있지만, 현실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핵심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홍보상의 문제이긴 하나 ‘주연’으로 알려져 있던 한채영의 대사가 실은 통틀어 5분이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은 비슷한 맥락에서 전혀 의아한 일이 아니다. 극장을 찾는 목적이 배우 얼굴 보기 위해서만은 아닐진대, 청량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한채영의 역할은 쇼프로에서 웃는 것 외에는 아무 임무도 주어지지 않는 여자 MC의 비중보다 더 작다. 그 외 다른 여성 캐릭터―퍽치기범의 손에 죽음을 맞는 여성의 비극적인 스토리는 그녀가 어린 남매의 어머니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지나치게 편협한 시각으로 보이는가? 그런 딴지를 영화는 걸고 싶게 만든다―들이야 더 말하면 입아픈 일.
앞서 이미 언급한 대로 상업영화로서 <와일드 카드>가 가진 장점들은 적지 않다. 영화는 드물게 재미있으며, 녹록치 않은 유머와 박진감, 형사들의 피보다 진한 의리가 자아내는 감동이 노련한 솜씨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얼핏 국부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는 문제점들은 결코 소홀히 취급할 부분이 아니다. 영화의 성실한 형사들을 전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면, 그건 ‘문제들’이 영화에 대한 신뢰의 토대 자체를 뒤흔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얘기를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