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커피 대신 얼음 띄운 음료가 그리워지고, 옷장 깊숙이 개어둔 민소매 셔츠에 눈길이 갈 때. 문득 불어온 바람에 섞여있는 소금기를 느끼는 순간 우리는 예감한다. 어, 여름이다. 댄스뮤직의 도입부처럼 신명나게 "야! 여름이다!"라고 외치는 사람이건, 숨막히게 달아오르는 열기와 눅진하고 습한 공기를 떠올려내고 "쳇 또 여름이야"를 읊조려대는 사람에게건 공평하게 계절은 온다. 그리하여, 조금 있으면 또 여름이다.
내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고 증오하게 한다는 이유 때문에 여름이 무섭다고 했던 것은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던가? 글이 담고 있는 탁월한 통찰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범인들에게라도 확실히 여름의 희노애락은 겨울과 다르다. 이를테면 보기 좋게 태닝한 얼굴로 외국의 섬이며 산이며를 유람하며 작열하는 태양빛을 만끽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박탈감, 아니 굳이 거기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말이죠. 이를테면 이런 거다. 석이자식이랑 영이기집애는 다 엄마 아빠랑 피서 간다고 자랑자랑인데, 난 올해도 니X럴 마당에서 다라이 수영 신세니.... 비교되게스리. X팔려서 일기장엔 뭐라고 쓴다지? 앗. 초등학생의 언어로 부적격인가? 너무 오래 전에 졸업해놔서.
가족이 없다는 것은, 이를테면 늘 배가 고픈 것과 비슷한 감흥일 테다. 영원히 채울 수 없는 공복, 하소연하기엔 새삼스러운 만성적인 결핍.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초등학생 마사오(유스케 세키구치)는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돈 벌러 간 엄마를 찾아가기로 한다. 때는 여름방학. 친구들은 모두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산으로 들로 놀러나가고 너도나도 피서를 떠난 동네는 텅 비어있다.
아홉 살 짜리가 길을 떠나기 위해서는 보호역이 필요한 법. 그런데 이 보호자가 또 영 시원찮다. 호랑이 같은 부인에게 등 떠밀려 마사오의 엄마 찾기 여행에 동반하게 되는 기쿠지로 아저씨(비트 다케시)는 별 볼일 없는 야쿠자로, 다른 사람 열 받게 하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인물이다. 게다가 여비를 경륜으로 일찌감치 몽땅 날려버리는 이쁜 짓까지 하신다. 쉰을 넘긴 나이에 삥 뜯고 남 곯려주는 것을 일생의 도락으로 아는 민폐덩어리 아저씨 VS 아무 때나 "응!"하는 게 특기인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의 소유자 마사오. 그러나 둘은 어쨌든 우여곡절 속에 엄마찾기 여행을 강행한다. 묵묵히 걷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다 보면 늘어진 두 개의 그림자는 어느새 꽤 어울려 보인다.
영화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 불쌍한 아이가 과연 역경을 딛고 엄마 품에 안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해 마사오는 결국 엄마를 만나지 못하며, 산산이 무너진 기대와 실망감 때문에 어깨를 들먹이며 울음을 삼킨다. 한편 영화가 보여주는 또 한 명의 버림받은 아이는 다름 아닌 기쿠지로 아저씨(생각해 보면, 제목부터가 '마사오의 여름'이 아닌 '기쿠지로의 여름'이다). 기쿠지로는 몰래 양로원을 찾아가 한 노부인을 먼발치에서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 돌아온다.
어쨌든 여행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두 명의 버림받은 아이들은 여정의 원래 목적을 잊은 듯 물가 옆에 캠프를 꾸려 마냥 신나게 놀아제낀다. 착한 폭주족들, 친절한 시인 등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해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갖가지 놀이들 속에 젖어드는 동안 두 사람 모두에게 슬픔은 없다. 그리고 갈림길에서 각자의 집을 향해 돌아서는 기쿠지로와 마사오가 서로에게 약속하는 말. "나중에 또 엄마 만나러 가자!" 비록 당초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영화의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마사오의 그림일기를 빌어 소개되듯, 일기장은 어느새 꽉 차버렸다. 행복하고 슬프고 가슴 두근거리는 추억의 페이지들로.
카메라는 꾸물꾸물 뒤를 따르듯 천천히 주인공들을 비추고, 마치 만화의 개그컷처럼 순간순간 멈추어서면서 웃음을 유도해낸다. <기쿠지로의 여름>은 폭력의 미학으로 대변될 수 있는 기타노 다케시의 다른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따스하고 귀엽고, 참을 수 없이 웃음 나오는 소품이지만 정중동, 여백과 정적 속에 살아있는 생생한 감정들만큼은 영락없는 기타노 표. 그리하여 기쿠지로와 마사오, 버림받은 두 아이의 여정은 벅차게 큰 선물들을 한 아름 안기며 일단락 된다. 함께 가면 먼길도 가깝게 느낄 친구, 두근거리는 추억의 페이지로 가득 찬 일기장. 그리고 관객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가장 사랑스런 여름 영화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