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 내려온 P. 무엇을 볼까 고심하다가 마침 지나가던 S를 붙들고 추천을 부탁한다. S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외친다. “켄 파크!” 정말 골 때리는 영화라 합디다, 난 사실 그 영화를 보러 여기에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입에 거품이 일랑 말랑하던 S는 갑자기 멈칫하더니 P를 살펴본다. 남들만큼 나이도 먹었건만 아직도 밤의 세계에서는 종종 검문을 당하는 P의 반짝이는 눈빛에 당황한 듯 입 속으로 뭐라뭐라 웅얼거린다. “음...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는 곤란하오. 직접 보시옷!” 광대뼈를 중심으로 반경 2센티미터 가량이 후끈 달아오른 S, 머리를 흩날리며 휘릭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간다.
입소문이 무섭다. 이 영화, 소문이 흉흉하더니 역시나 매진 사례다. 좌석수로만 치면 이번 영화제 상영관에서 으뜸이라는, 드넓은 전북대 문화관이 꽉 찼다. 관객들은 서로 수근덕거리며 눈을 빛낸다. 뭔가 기대하는 바가 있는 모양이다.
홍당무 색깔 머리를 지닌, 창백한 주근깨 소년 하나가 스케이드 보드를 지치며 내달려 온다. 꼭 미국 햄버거 업계의 웬 모 양 오라비처럼 생겼다. 소년이 멈추고 클로즈업, 화창한 햇살 아래 장난기가 어린 것 같기도 하고 텅 비어버린 것 같기도 한 알쏭달쏭 오묘한 표정이다. 바지춤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는가 싶더니 지체 없이 관자놀이에 대고 당긴다, 펑. 아무렇지도 않게 피가 흐르고 죽었다. 소년의 이름은 켄 파크.
<켄 파크>는 수위가 높다. ‘상식’을 벗어나는 성적 행위가 난무한다. 소년들은 목을 조른 채 카메라에 대고 자위를 하거나, 여자친구의 엄마와 잔다. 의붓 아버지는 잠자는 아들의 방에 몰래 들어와 그의 바지를 벗긴다. 소녀는 남자친구를 침대에 묶고 깨문다, 두 명의 소년과 함께 뒹군다. 그리고 태연하다. 짐짓 경쾌한 음악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버린다. 생뚱 맞은 아이러니가 관객을 당황하게 한다.
영화의 배경은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깨끗하고 정돈된, 행복의 상징처럼 보이는 이 풍경 속에서 온갖 변태(?) 행각들이 펼쳐진다. 그러고 보니 이 곳은 깨끗하되 건조하고, 정돈된 것처럼 보이지만 위태롭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완벽함.
작년, <키즈>로 영화계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던 래리 클락 감독은 이번 영화 <켄 파크>를 통해 정치적인 논의를 이어간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의심할 수 없도록 훈련받았던 (미국 중산층으로 대변되는)정상적인 가치들을 파괴하고 농락한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아메리칸 뷰티>의 엽기판처럼 보인다. 좀 더 전투적이고 노골적이다. 철저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가 소녀의 성행위를 목격하고, 그녀를 자신의 신부로 맞아들이며 평생 수절할 것을 강요한다. 여성이면서 혼혈인, 소녀의 욕망은 짓밟힌다. 정상적인 잣대는 타자를 억압하고 그들의 욕구 불만은 쌓이고 쌓여 폭발할 지경에 이른다. 아이들은 고무줄을 깡충깡충 넘으며 ‘아이를 낳아 휴지에 싸서 승강기에 버렸네’ 따위의 노래를 태연하게 불러댄다. 아연실색할 노릇이다.
타자들의 욕망에 주목하는 엉뚱한 방식은 관객들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끌고 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은 사무치게 다가온다. 켄 파크에게 건네는 임신한 여자친구의 마지막 대사 “너희 엄마가 너를 낙태한다고 했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니?”. 쓰고 멍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켄 파크가 죽어버린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