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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고 아름다운 소녀시절이여
천상의 피조물 | 2003년 4월 26일 토요일 | 임지은 이메일

서로에 대한 맹목적이고 지독한 애정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두 소녀의 이야기에 젖어들며 소녀시절을 추억한다. 생각해보면 여학교란 얼핏 예쁘고 안온해 보이지만, 그 어느 곳보다 격렬한 장소였다. 교복에 불투명한 까만 스타킹을 쌍둥이처럼 신은 우리들은 사실 소녀라기보다는 설익은 냄새가 나는 어린 여자들이었고,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서 서로를 필요 이상으로 사랑하거나 때로는 증오하기도 했다.

필자가 중학생이던 시절 학교에서 유행했던 것 한 가지는 좋아하는 친구에게 혈서를 써보내는 일이었다. 연필 깎는 칼로 손을 살짝 베어 피를 짜내고, 뾰족한 필기구 끝에 핏방울을 묻혀 종이에 ‘우리의 우정’에 대해 써내리는 일. 그렇게 아이들은 검붉은 글씨가 빼곡이 적힌 종이를 서로 은밀히 주고받았다. 이건 좀 극단적인 경우였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엔 모든 것이 ‘과잉’이었다. 국어를 가르치면서도 자주 맞춤법을 틀리는 늙은 남자선생님을 있는 힘껏 비웃었듯, 문득 찾아오는 모든 감정에 사력을 다해 반응하곤 했다. 마치 <천상의 피조물>의 영특하고 설익은 소녀들처럼.

<천상의 피조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영화의 감독이 피터 잭슨이라는 것부터 언급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반지의 제왕>의 엄청난 성공으로 피터 잭슨―마치 호빗과 드워프의 중간체처럼 생긴―의 이름은 적어도 ‘그냥 영화감독’ 정도로 흘려들을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같은 맥락에서 무심히 들른 비디오 가게에 <천상의 피조물>이 출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환호성을 지른 사람들 중 다수는 <반지의 제왕> 감독의 예전작으로 이 영화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고무인간의 최후>, <데드 얼라이브>에서 <프라이트너>를 포괄하는 피터 잭슨의 다른 작품들과 이 무섭도록 진지한 영화가 만나는 접점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굳이 찾아낸다면 <고무인간...> 같은 조잡한 B급 무비를 만들든, <반지의 제왕>으로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펼쳐보이든 늘 관객을 놀라게 하는 감독의 재간이 <천상의 피조물>에서도 역시 드러난다는 것 정도가 공통점이 될까?

영화는 1950년대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촌스러운 검은머리에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폴린은 어느 학교에나 꼭 한 명씩 있을 법한 외톨이 스타일의 소녀. 그녀는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선생님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는 우등생이 되는 대신 늘 홀로 교실 뒷자리에서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그리고 줄리엣(케이트 윈슬렛)이 폴린의 반으로 전학을 온 중학교 3학년, 모든 것이 변해버린다.

재치 있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모든 것에 자신의 견해를 날카롭게 제시하는 줄리엣과 감수성 예민한 폴린은 오래지 않아 숙명처럼 서로를 ‘발견한다’. 우정과 애정의 경계를 손쉽게 뛰어넘는 끈끈한 유대감 속에 소녀들은 공고한 둘 만의 성을 만든다. 그러나 둘의 관계를 ‘건강하지 못하다(물론 레즈비언을 암시하는)’고 규정한 어른들이 그들을 갈라놓으려 하면서 이 친구 혹은 연인은 이별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특히 두 소녀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폴린의 어머니는 소녀들의 가장 큰 적.

<천상의 피조물>은 1954년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실제로 있었던 살인 사건에 토대하고 있는 작품. 평화로운 마을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어느 날 벽돌로 머리를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시신이 발견되었다. 오노라 리퍼라는 이름의 중년여인을 죽인 범인은 다름 아닌 그녀의 딸 폴린 리퍼와 딸의 단짝친구 줄리엣. 후에 폴린의 집에서 일기장을 발견한 경찰은 폴린과 줄리엣을 살인죄로 기소한다.

실제 사건에서 유추할 수 있듯 두 소녀가 둘 만의 세계를 파괴하려하는 폴린의 엄마를 죽이는 것은 이 영화의 결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포일러라고까지도 할 수 없는 것이, 피투성이가 된 두 소녀가 “엄마가 다쳤다”고 울부짖으며 까페로 뛰어들 때 관객은 이 불길하고 아름다운 영화의 끝을 미리 어렵지 않게 예감하게 된다. 오히려 영화가 의도하는 것은 유례없는 살인사건의 현장을 다큐멘터리처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두 소녀 사이에 오갔던 감정의 격랑을 온전히 되살려내는 일. 그런 맥락에서 피터 잭슨이 원작으로 삼은 것은 경찰의 사건 기록이나 당시의 신문 기사보다는 폴린의 일기장이라고 하는 쪽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링>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천상의 피조물>은 마치 폴린의 머리 속을 염사해 낸 것 같은 영화. 푸치니의 오페라 아리아가 스크린을 타고 흐르는 가운데 둘은 함께 손을 잡고 유니콘이 뛰어 다니는 녹색의 정원(의 환상)을 본다. 줄리엣과 폴린이 창조해낸 세계의 찰흙으로 만든 인물들은 아무렇지 않게 타인을 학살하고, 드라마틱한 사랑에 몸을 던진다. 확실히 서로를 이야기 속의 주인공으로 치환해 열광적인 편지를 주고받는 폴린과 줄리엣의 사랑이 지극히 ‘소녀다운’ 것이기는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소녀답다’는 감흥을 유치하다거나 설익었다는 것과 섣불리 혼동해서는 안될 것 같다. 소녀다움. 그저 감정의 지극한 과잉. 순간 순간 찾아오는 모든 것들에 사력을 다해 반응하기. 그리하여 이곳과는 다른 세계를 둘 사이에서나마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토대 말이다.

내게도 소녀시절은 있었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아주 간혹 그 때의 친구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으레 이어지는 지리한 연애 이야기, 매일 바쁜 일 이야기, 그리고 또 범상한 일상들. ‘건강하다’는 것을 ‘섬세하지 못함’의 동의어로 여기고 지극히 경멸했던 우리들은 어느새 건강하기 그지없는 생활인이 되어 하루하루를 나름대로 수월히 살아내고 있었다. 그리움과는 전혀 별개로 “우리의 소녀 시절은 끝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씁쓸히 되새기지 않을 수 없는 때, 그런 순간들마다 <천상의 피조물>은 불길한 예감처럼 떠올라 머릿속을 지배한다.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모든 것이 과잉이었던 시절 폴린과 줄리엣보다는 무디고 좀 덜 영민했다는 사실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미 중년을 훌쩍 넘긴 폴린과 줄리엣은 성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각기 작가와 승마학교의 교장으로 ‘성실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단다. 가석방될 당시 내려진 “다시는 서로 만나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지금은 그들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지 않을까? 무사히 지루한 어른이 된 내가 지금 느끼는 서운한 안도감처럼.

1 )
ejin4rang
잘만들어진 영화   
2008-10-16 14:4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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