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를 들먹인 카피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한 교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련의 ‘교사 영화’에서처럼 이 영화 역시 교사의 인간미와 신념, 교육을 향한 열정을 다루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사가 학생을 감화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당당 거리낌없는 ‘스승’의 위치에 오르는 대부분의 플롯에서는 벗어나 있다. 훈더트 선생은 점찍은(?) 학생에게서 배신당하고 경영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교장직에서 밀려나는 등 거듭 좌절을 겪는다.
고풍스런 건물의 성 베네딕트 학교. 훈더트 선생은 이 곳에서 그리스 로마 문화를 가르친다. 사립학교 특유의 말쑥한 교복을 입은 아이들, 막 10대에 접어든 듯한 그러나 아직은 고분고분하고 숙제 잘 하는 남자아이들이 그의 제자이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 속에 아득한 시절을 읊조리고 잔디로 뛰어가려는 학생의 발걸음을 길로 돌려놓는 교사 훈더트의 평온한 생활은 세드윅 벨의 전학으로 흔들리는가 싶다. 처음부터 거슬리는 농담으로 교실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며 등장하는 세드윅 벨은 사사건건 반항이다. 훈더트는 이 삐딱한 학생에게 당황하면서도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세드윅 벨 또한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훈더트 선생은 다크호스 세드윅의 놀라운 성실도 향상에 쾌재를 부르며 지원을 아끼지 않지만 그것도 잠시, 세드윅은 줄리어스 시저 경시대회에서의 결정적 배신으로 훈더트의 신념을 산산이 무너뜨린다.
심리와 드라마를 중점으로 놓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캐릭터이다. 생동감 있는 캐릭터는 흡인력을 갖고 있기 마련. 하지만 단순히 인물에게 어떤 인과관계를 부여한다고 해서 특정 캐릭터가 입혀지는 것은 아니다. 인물을 다각적이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조망할 때 비로소 캐릭터가 숨을 쉰다. 이런 점에서 <엠퍼러스 클럽>은 캐릭터 구축에 실패한다. 시도는 보인다. 교사 훈더트가 그리스 로마 문화라는 고리타분한 지식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 그러면서도 유부녀와 사랑에 빠져 있다는 점, 길로 다닐 것을 강조하지만 가끔은 그 자신이 유리창을 깨고 만다는 점 등 여러 설정을 동원해 그를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훈더트는 별반 매력적이지 못하다. 동원된 설정들은 기계적이고 도식적이다. 그는 그리스 로마 문화가 필요 없는 지식이라는 지적에 발끈하며 자신의 교육관을 대변하는 신념을 줄줄이 늘어놓지만 곧 풀이 죽어버리는 통에 자신의 신념을 자격지심처럼 비추어 버리는 사내다. 반항아 한 명에 눈이 멀어, 그의 편애로 인해 낙담한 제자는 돌아보지 못하는 열정 없는 인물이다. 이러한 점은 제자 세드윅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의 반항심리에는 아버지의 무관심과 강압이라는 뻔하디 뻔한 원인이 따라 붙지만 그것 역시 흐지부지 되어 버리고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는 편안히 ‘부전자전’이라는 수순을 밟고 있다. 쉽게 평면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인물들이 캐릭터를 제대로 품지 못하고 겉도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쫓기 바빠 겅중겅중 뛰어 넘는 연출의 탓이 크다. 왠지 주춤거리는 케빈 클라인의 연기도 아쉽다.
영화는 음악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시도 때도 없이 스크린을 덮는 장중한 현악 선율은 감동을 강요한다. 안 그래도 겉도는 캐릭터와 과잉된 음악의 부조화는 영화를 더욱 지루하게 만든다.
교사를 신성화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려 했던 것, 스승과 제자의 영향관계를 쌍방향적인 것으로 설정한 것은 분명 이 영화의 장점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교육의 희망을 설파하는 것 같은 이 영화의 내면적 톤은 오히려 절망에 가깝다. 교사의 신념은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못했고, 처음부터 마땅히 경시대회에 나갔어야 했을 학생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의젓하다. 결국 모든 인물은 한 자리에서 나고 지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의지도 개입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런 모순은 <엠퍼러스 클럽>을 도대체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제목만큼이나 애매하고 우유부단한 영화로 만들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