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공간의 비약적 팽창과 함께 CG 애니메이션의 범람의 시대에는, 실존하는 배우들의 육체야말로 그 자체로 스펙터클이고 '사실성'을 받쳐주는 확고한 보루이다. 그러기에 수많은 대중들은 그들을 자신들의 시선 안에 두고자 기꺼이 그 욕구를 표출화시켜 드러낸다. 하지만 이것은 늘 집단적 형태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역으로 스타는 더 멀어져만 간다.
스타는 잘 알고 있다. 그럴수록 자신들을 향한 대중들의 욕망이 사그라지기는커녕 더욱 증폭된다는 것을. 이러한 자본주의적 통과 의례를 자주 겪다보니 안타깝(당연하)게도 교만함과 오만함으로, 달리 말해 미덕을 악덕으로 치환한 배우가 배태되는 상황이 현재 연출되고 있다. 물론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실재에 바탕을 둔 그들의 육체성이 온전한 상태로 대중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수준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그래서 조작과 허상의 이미지가 실재를 집어 삼킨 채, 주인의 행세를 하고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판별할 수가 없다.
영화 <시몬>은 이처럼 전지전능한 권한을 부여 받은 스타 배우들과 그것을 가능케 한 할리우드 시스템에 대해 조소를 퍼 붓는 코미디 영화이다. 그와 동시에 <시몬>은 진짜보다 더욱 진짜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슈퍼스타 장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려 실재보다 훨 실재 같은, 파상실재이자 원본 없는 복제물 시뮬라크르에 대한 심각하지 않은 경쾌한 고찰이다. 제목부터 원본과 복제물의 구분 그 자체가 소멸한다는 작업을 가리키는 시뮬라시옹의 원 < simulation one >의 줄임말 < simone >이지 않는가!
실의에 빠져있던 빅터에게, 그의 열혈 팬이라 자처했던 컴퓨터 엔지니어 행크가 죽기 전에 남긴 유품 CD가 전달된다. CD 안에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사람과 식별 불가능한 사이버 여배우 시몬을 창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담겨져 있었다. 제인 폰다, 그레이스 켈리, 소피아 로렌, 오드리 햅번 등 고전 여배우들의 장점만을 뽑아내 합성시킨 디지털 배우 시몬의 스크린 등장은 의심의 여지없이 대성공. 재기에 성공한 빅터는 부와 명예뿐 아니라 전처인 일레인(캐서린 키너)과 딸로부터도 신뢰를 회복한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인기가 치솟아 오른 시몬은 더 이상 빅터의 품 안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존재가 돼 버린다. 아니, 되레 그가 시몬에 의해 통제 받는 지난한 형국으로 영화는 치달으며, 결국 빅터는 자신이 창조한 환영에게 스스로 갇히는,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를 그대로 밝는다.
<시몬>은 짐짓 무거운 주제를 유쾌하고 경쾌하게 풀어나간다. 하지만 영화는 코미디로도 풍자극으로도 뭔가 부족한 듯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할리우드의 스타시스템을 조롱한다는 소재가 이미 곰팡이가 필 정도로 해묵은 것이 된 이상, 좀더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해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코미디 역시 내용상 쉽게 간파될 수 있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물론, 디지털 배우에 대한 논란에 불을 지핀 <파이널 판타지>이후에 영화가 곧바로 소개되었다는 것도 <시몬>에게는 장점보다는 왠지 뒷복 같은 약점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7000원이라는 돈의 가치에 충분히 값하는 영화이다. 타 작품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조울증 환자 같은 증세를 보이는 알 파치노의 연기와 그의 전처 역할로 분한 캐서린 키너의 호연도 그러한 이유 중의 하나지만, 무엇보다 <시몬>의 매력은 사이버 배우 시몬을 창조하는 공간에 있다.
차가움이 그득히 느껴지는 넓디넓은 지하에 위치한 스튜디오, 이 곳에는 컴퓨터 한 대와 대형 모니터, 그리고 타란스키가 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편안함을 제공해주는 의자가 있을 뿐이다. 조물주의 전능을 그대로 부여 받은 타란스키와 그가 키보드로 빚은 시몬과의 교감 아닌 교감은 인간의 그것 이상으로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제목 그대로 시뮬라시옹이 재현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대형 모니터에 비친 시몬의 모습은 알 파치노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고 보여 진다. 자신이 시몬을 만들었다고 전 부인에게 말해도 "아니, 시몬이 당신을 만들었죠"라는 아이러니 한 상황. 우리는 그 과정을 다 알고 있음에도 전 부인인 캐서린 키너의 견해에 동의하게 된다. 그만큼 우리는 실재보다 허상의 이미지에 더 집착하고 영향 받는 시공간에 안착해 있다는 것이다.
<시몬>은 <트루먼 쇼>의 각본을 쓰고 <가타카>를 연출했던 앤드류 니콜의 두 번째 장편극임과 동시에 전작들의 테마와도 동일선상에 위치한 작품이다. 물론, 정서적 흡입력 면에서는 전작에 비해 조금은 모자란 것이 사실이나, 적당한 풍자와 코미디 속에서 영화가 끝남에도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사변적인 영화로서의 <시몬>은, 분명 볼 만한 작품이다.
잡설
영화의 디지털 배우인 시몬의 정체는 실제 인물로 얼마 전에 밝혀졌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