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소련 및 서유럽 등지를 악의 축의 본거지로 설정해 한판 대결을 펼쳐왔던 전통의 007을 이번엔 북한 북청 해변에 서핑 보드 하나만을 장비시키고 (알다시피 북한 해변에서는 서핑이 불가능하다. 항상 쿨한 신무기만을 지급해왔던 Q도 똑 같은 일을 40년씩 하다 보니 노망끼가?) 급파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주연 피어스 브로스넌과 리 타마호리 감독이 입을 모았듯 북한이 전 세계에서 가장 일촉즉발의 위험을 안고 있으며 최후의 분단국가로서 냉전의 대치상황을 리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더욱이 최근엔 핵연료 시설의 봉인을 뜯어내고 감시카메라를 없애 IAEA로부터 강력 제재를 예고 받고 있는, 국제 사회의 질서를 감히 무시하는 ‘깡패국가’라고 할 수 있어서? 어디서 연유하였든 <007 어나더데이>는 메인 배경으로 한반도를 점찍었고 영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북한의 이미지를 왜곡하는 몇몇 장면을 지적하며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한 네티즌들에 의해 시작된 <007 어나더데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릭 윤, 리 타마호리 감독과 문대령 역할에 캐스팅 제의를 받았던 차인표의 설전 그리고 20세기 폭스 코리아의 이주성 대표의 해명 인터뷰 등으로 제 2라운드로 접어들며 이제 개봉일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상태.
북한군의 14개월에 걸친 혹독한 고문에 007로서는 처음으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는 제임스 본드에게서 풍겨나오는 인간적인 매력은 물론, 더욱더 노련해지고 섹시해진 피어스 브로스넌과 007 못지 않은 강한 액션을 자랑하는, 필자가 그렇게도 바래왔던 제대로 된 여성 스파이(에 근접한) 할리 베리 그리고 연말 흥행 라이벌들인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반지의 제왕 : 두개의 탑>보다도 월등한 제작비를 들이 붓게 한 아이슬랜드의 얼음 궁전 장면과 빙하 위의 카 체이스, 초고속 호버크래프트 추격씬 등은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007 액션 스펙타클의 진수를 보여준다. 게다가 <007 살인번호>의 본드걸 우슐라 안드레스의 비키니 스타일을 재현한 뇌쇄적인 할리 베리와 제임스 본드의 이름이 유래된 책인 ‘서인도 제도의 새들’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등 이전 007 시리즈에 대한 오마쥬가 포함되어 올드팬들의 향수를 기분 좋게 자극한다. 그러나 <007 어나더데이>의 미덕은 여기까지.
한국개봉을 위해 다시 더빙하였지만 여전히 어색한 문대령과 자오의 한국말 대사, 007과 징크스가 탄 헬리콥터가 추락하는 한국의 농촌이 후진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장면, 둘이 정사를 나누는 곳이 불상이 있는 절이라는 것 그리고 북한에 침투하는 두 스파이가 ‘청천 1동대’ 군복이라는 것 등 예전부터 지적되어 왔던 장면들은 오히려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영화 후반부, 적화통일의 야욕에 불타는 문대령과 자오의 신무기 ‘이카루스’가 DMZ에서부터 남한으로 방향을 잡고 차례차례 폭격을 가해 ‘불바다’를 이루는 ‘데프콘 2’가 발령되는 한반도 절대절명의 위기에도 미국 CIA와 영국의 MI-6 요원들만이 모여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영화에 흐르는 냉전 논리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결정적 장면’에 이르러서는. 씁쓸함을 감추기는 힘들다.
한국을 제외한 전세계의 영화팬들이 007 제임스 본드의 탄생 40주년 및 20번째 시리즈 탄생을 박수로, 밀려드는 관객수로 경축하더라도, 그리고 <007 어나더데이>가 007 시리즈 사상 최고의 개봉 흥행 수익을 기록하며 다시 한번 가장 인기 절정 시리즈물의 위상을 드높이더라도, 그럼에도 나는 이 팝콘 무비 한 편을 보며 마냥 웃고 즐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