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퍼 로페즈의 겁먹은 표정과 불길한 카피는 <이너프>를 오싹한 스릴러로 예감하게 만들지만, 영화는 다소 의아한 멜로 드라마로 시작한다. 웨이트리스인 슬림(제니퍼 로페즈)의 분주한 모습에 겹쳐지는 앙증맞은 글씨체의 오프닝 크레딧은 꼭 로맨틱 코미디의 그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대학 중퇴하고 식당에서 음식이나 나르고 있다해도 예쁜이에게는 백마 탄 왕자가 찾아오는 법. 슬림 또한 돈 많고 핸섬하고 자상하며 게다가 기사도 정신으로 똘똘 뭉친 남편을 만나 집안에 들어앉게 되는데.
아니 정말 이상하네 내가 극장을 잘못 찾아 들어왔나, 예쁜 딸까지 낳고 알콩달콩 잘 사는 슬림을 바라보며 머리 위로 물음표를 수십 개는 떠올리고 있을 때쯤, 영화는 급회전한다. 슬림이 남편 미치(빌리 켐벨)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면서 완벽했던 그녀의 가족이 깨지기 시작하는 것. 미치가 한 마리 광포한 야수로 돌변, 도망가려는 슬림에게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영화는 스릴러의 궤도에 오른다.
초반부 슬림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소제목이 달린 까만 화면의 삽입으로 단절되고, 압축된다. 끊어진 내러티브는 그러나, 우리의 인식 속에서 무리 없이 진행된다. 이것은 영화가 보여주는 여성 이야기(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가 관습에 불과하며 진실이 아님을 드러내는 형식이다. 대신 후반부 힘 센 남성이 연약한 여성을 추격하는 무시무시한 장면은 끊김 없이 보여줌으로써 현실감을 더한다.
<이너프>가 기존의 남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상당히 공격적이다. ‘다처제적’ 성욕과 여성에 대한 우월감 등 여성을 불만스럽게 했던 남성의 특성은 물론이고, 의리로 무장한 남성간의 우정이며 남성 특유의 ‘가족 판타지’까지 모두 공격의 대상이다. 그들의 의리는 비열하고, 외도를 하면서도 가정을 지키려는 남성의 모순은 이기적이다. 게다가 그들은 폭력적이다. 부당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그들은 영화가 무찔러야 할 ‘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남성이 탈출할 구멍이 있기는 하다. 과거를 청산하여 불합리한 남성성을 버리고 여성에게 보상한 후(슬림은 아버지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는다), 여성성을 겸비한 남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슬림을 도와주는 또 다른 남자는 자신의 잠자리 기술에 열등감을 갖고 있지만, 다정하고 사려 깊다)이다. 이렇게 적어 놓으니 지극히 옳으신 말씀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슬림이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슬림의 모습은 또 다른 남성의 휘하에 들어가 보호받는 의존적 여성 캐릭터에서 탈피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영화 속에서 슬림이 여전사로 태어나는 과정은 다소 황당하여 실감 나지 않지만, 3개월 동안 무술을 배우며 육체를 단련했다는 제니퍼 로페즈의 고군분투는 꽤 실감난다.
마지막까지 이 영화의 제목만은 해석해 내지 못했는데 ‘이너프’라, 무엇이 충분하다는 것일까. 남성들의 세상이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것일까, 영화 속 여성의 반란이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