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애>는 해탈한 듯한 평온한 표정으로 물 속을 신비스럽게 유영하는 미흔(김윤진)의 얼굴과 몸으로부터 오프닝을 연다. 마치 김기덕 감독의 <악어>에서 악어(조재현)가 유일하게 자유와 행복감에 젖어들 수 있는 공간인 물 속에서 수영하듯. 미흔과 악어는 그러나 수면위로 그들의 존재를 드러냈을 때는 서로 극단적으로 배치된다. 악어는 세상과 불화하는 인물로, 미흔은 남편과 자식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 생각하며 평범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주부로.
전경린의 장편소설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원작으로 한 <밀애>는 이렇듯 삶이 큰 다침 없이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 미흔(김윤진)의 일상적 모습과 함께 시작된다. 하지만 그녀의 소박한 믿음과 신뢰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심하게 균열을 일으키며 끝내는 유리알처럼 산산조각나기에 이른다. 자신의 남편(계성용)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한 여자가 집에 찾아와 모든 것을 폭로한 것이다. 영화는 사뭇 호러물의 섬뜩함까지 느낄 정도로 미흔의 참담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어두운 내면을 형상화시켜 잘 묘파하고 있다.
<밀애>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불륜’이라는 소재를 매혹적이고 진정한 파괴력을 지닌 사랑으로 그린다. 또한 역사의 망령에 짓눌려 일생을 보내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담은 다큐 <낮은 목소리>와 <숨결>를 연출했던 여성 감독 변영주의 첫 장편 극영화이기에 더욱 세간의 시선을 불러들이고 있다. 소재는 분명 통속적이지만, 감독은 낯선 방식을 끌어 들여와 낯익은 대화를 또 다르게 얘기해보자고 한다. 결국, 불륜이라는 소재를 불륜스럽게 관객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특히 남성이 느끼기에는). 기존의 일탈적 사랑을 다룬 TV드라마나 극영화와는 달리, <밀애>는 애절하게도, 끝이 모호하게도 그들의 불온한 사랑을 그리지도 않고, 남편과 자식, 즉 가족을 영화 안에서 배제시킨다. 오로지 미흔이라는 한 여성의 몸과 열정에만 영화는 관심을 두고 단계적으로 장면을 페이드아웃(화면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사라짐)시키면서 그녀만을 쫓아간다.
미흔은 잃어버리고 도둑맞은 자신의 정체성을 인규와의 몸 관계를 통해 되찾는다. 그들의 격정적인 정사장면은 하나의 제의이다. 혼령 같은 그녀에게 육신과 정신을 불어 넣는 숭고한 의식이기에 화려하지 않고 묵묵하게 거리를 두고 카메라는 그들을 응시할 뿐이다. 그러하기에 이들이 펼치는 섹스신은 그다지 파격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제의의 성스러움을 위해 본능적으로 그녀의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야말로 지켜보는 우리들을 더욱 홀리게 하는 주문으로 받아들여진다. 똑같은 말이지만, 그녀의 교성소리가 이미지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다만, 한낮의 대밭에서 벌이는 그들의 섹스는, 닫힌 공간에서 치르는 그것과는, 좀 기묘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의식이나 섹스가 밤에 이루어지기에, 낮에 열린 공간에서 벌이는 그들의 정사가 금기의 깨뜨림에서 비롯된 위반의 쾌감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자고로, 사방이 뚫린 공간에서 햇빛이 작열하는 한낮에 일어나는 살인이 더욱 끔찍하게 보이는 법.
아이러니 한 것은 미흔이 강탈당했던 자신의 생의 의지를 같은 방식으로 찾아와 회복한다는 것이다. 허나 중요한 건, 세상으로부터 지탄받는 이 불륜이라는 방식을 통해 미흔이 진정성과 정체성을 발견해 내재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감독은 이 방식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고 말을 건네며, 우리를 채근하는 것이다.
영화는 미흔의 욕망과 열정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공간을 이용해 그의 얼굴과 육체를 세심하게 보여준다.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롱숏(멀리 찍기)을 주로 사용하면서...특히, 구획화되어 있는 작은 공간에서는 그 의도가 빛을 발한다. 하지만 남해의 천혜와 같은 단아한 풍경 안에서 영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밀애>는 수채와 같은 이런 공간에 미흔을 거의 위치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역으로는 그러한 공간의 쓰임새가 빛이 바래기도 한다. 동시에 나비마을을 가로지르는 신작로와 같은 아스팔트의 길은 미흔의 앞날을 보여주는 복선으로써 쓰여 진다.
<밀애>를 보고 나서 대부분의 남성들은 마뜩찮은 표정을 지웠다고 한다. 본 필자도 남자이기에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불편하고 단박에 와 닿는 무언가가 없었음을 고백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양상은 생물학적 성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성인 젠더까지 포함되어 기인된 현상으로 파악된다. 무엇보다 영화는, 남성의 시선이 밖에서밖에 머물지 못하도록 차단되어 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규 역시 남자들에게는 능력 있는 플레이보이 정도로만 보인다는 점이 그렇고. 또한 전언했듯 미흔과 인규가 자신들의 욕망에 매혹되어 펼치는 의식이 게임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벌이는 정사가 진정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외형적 틀, 달리 말해 몸을 섞기 전과 후에 벌이는 그들의 행동과 말이 다분히 게임처럼 단순하고 때로는 허접하게 보일 정도로 육체성에만 초점을 두어 의도적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에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진지함과 가벼움의 충돌. 결정적으로 감독은 이 영화를 여성들을 위해 만들었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될 증후일 수도 있을 게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쉼터라는 비루한 가게집의 기구한 팔자의 여인, 미흔의 내면을 외면으로 표출시킨 분신일 수도 있는 그 여자와 미흔과의 관계를 좀더 발전시켜 부각시켰으면, 보는 이들이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미흔에게 바짝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인규와 미흔이 몰두하는 2인용 게임은 사회적으로 위험하고 일탈적이다. 그들 역시 이 게임이 오래가지 않아 이내 끝날 것이라 사실을 자명하게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하게 복무한다. 우리들은 그럼으로써 오프닝 장면과 대구를 이루는 엔딩 숏의 미흔의 얼굴을 보면서, 허물어져 가야 할 불륜이라는 제도를 어떻게 재축조할지 다시금 근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