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한국의 극장가에는 에로티시즘, 더 나아가 영화 속 성적 표현에 대한 논란을 부추기는 영화들이 쏟아지면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이 가속화되는 등 적잖은 소동을 겪었다. [노랑머리]로 인해 불붙은 이러한 움직임은 지난 해 하반기에 [거짓말]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물꼬를 틀며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거짓말]에 대한 일종의 스캔들적 파문을 차치하더라도 이같은 논란은 역설적으로 영화가 섹스를 화두로 접수하고, 표현하는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담당하며,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성의 결을 표현하는 영화들이 보다 쉽게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디딤돌과 같은 역할을 제시하였다.
사도마조히즘을 극단의 강박관념으로 완성한 [거짓말]을 필두로 국내 극장가를 찾은 [샤만카]와 [감각의 제국]역시 광기의 극단을 추구하며, 관객들에게 지독한 현실 속에서 꿈틀거리며 비린내를 풍기는 성의 판타지를 전달해 찬반양론을 이끌어냈다. 비록 섹스를 일종의 정치적 비유로 선택, 이상주의자의 패배를 나른한 섹스의 기운으로 담아낸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이나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같은 영화들을 [샤만카]나 [애나벨 청 스토리]와 같은 영화들과 동일한 범주 안에서 묶어 보려는 시도는 다소 무모한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영화들이 일정 간격으로 개봉되면서 섹스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함의를 읽어내려는 시도들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고정적인 틀 안에서 섹스를 말하려는 시각에 대한 공격의 기제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성의 굴절과 수많은 오해를 풀어 헤치는 데 큰 기폭제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사상 가장 충격적인 동시에 매혹적인 오프닝 씬 중 하나로 손꼽히는 [베티 블루]의 도입부에서부터 열정의 속삭임을 강하게 전달하는 베티와 조르그의 사랑은 영화가 전개될수록 섬세하게 가슴을 어루만지듯 열정의 극단을 파고든다. 마치 어린 아이를 연상시키듯 지독히 순수한 베티의 이미지는 이처럼 강렬한 색채의 열정적인 드라마를 매우 부드럽게 채색하며 사랑스러운 감정의 파장을 전달한다.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베티의 야생적 몸부림은 위험한 동시에 한없이 애처로운 열정의 파국을 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전달하며 미묘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감독 장 자끄 베넥스는 사랑을 향해 출몰하는 베티와 조르그를 통해 사랑과 열정의 진공상태를 그려내는데 주력한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바람을 향해 거듭된 시행착오를 겪는 그들의 사랑을 통해 열정에 닿을 수 있는 사랑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낯설 수 있는 가를 말하는 베넥스는 몸과 몸이 만나는 순간에도 살갗이 닿는 섬세한 오르가즘 뒤에 남아있는 처연함에 주목한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백치처럼 아무런 제약없이 누드로 거리를 활보하고, 자해를 서슴지 않는 베티의 서슬퍼런 광기와 그런 베티를 통해 달콤한 백일몽을 꾸는 조르그의 열정적인 사랑이지만, 베넥스는 마치 낯선 판타지를 전달하듯 묵묵히 그들의 사랑을 스케치할 뿐이다.
베아트리체 달의 매력에 힘입어 스크린 속에서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베티라는 인물을 통해 나른한 기운으로 채워진 백일몽을 구체화하는 베넥스는 의도적으로 베티에게 가공된 순수를 입혀 극단적으로 치닫는 열정의 판타지를 더욱 신비하게 채색한다. 하지만, 베티의 극단적 광기와 순수, 무모한 열정은 [샤만카]의 여주인공처럼 비극적인 광기의 아우라만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베티 블루]에서 베넥스는 베티에게 처연함을 선사하는 대신 비극적인 허상의 껍질을 깨지 못하도록 따뜻한 순수의 기운을 불어넣어 열정의 파국에 가 닿는 비극의 정서를 매우 따스한 기운으로 탈바꿈시킨다.
이처럼 베넥스의 영화에서 여성은 한없이 이상화되어 남성의 판타지를 구체화한다. [디바]의 베트남 소녀와 오페라 디바, [하수구에 뜬 달]의 나스타샤 킨스키, [베티 블루]의 베티가 그 주인공들. [베티 블루]가 격정과 살의 호흡이 어우러지는 사랑의 언어인 동시에,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남성 조르그에게 끊임없이 성취 욕구를 북돋워주는 역할로서의 여성(베티)의 이미지로 채워진 백일몽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사랑의 판타지를 완성하는 베넥스의 시선 덕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티 블루]에서 베티는 결코 건조한 인물로 비춰지지 않는다. 조르그에게 백일몽같은 판타지로서 다가온 캐릭터로 보는 시각에 대해 일부 평단에서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지만, 베넥스에 의해 재창조된 베티는 열정과 순수의 화신으로 모든 이미지를 압도하는 생명력을 자랑한다. 가장 단순한 듯 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모호하고 신비스러운 대상으로서 베티는 여전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1시간 가량 늘어난 [베티 블루]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은 무한하다. 붉은 빛과 황금 빛을 넘나들며 강렬한 색채의 황홀함을 전달하는 놀라운 이미지들과 여전히 매혹적인 가브리엘 야레의 음악은 백일몽의 나른한 기운에 젖어들게 만든다. 또한 베티와 조르그를 감싸는 삶의 풍경들이 더 넓게 다가와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넓히며, 그들의 사랑에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조르그의 시선을 통해 베티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베티 블루] 디렉터스 컷은 2시간 여의 절름발이 필름에 남아있던 모호함을 일정 정도 제거한다. 베티는 더 이상 극단적인 광기만을 내뿜지 않으며, 조르그 역시 그저 따스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끈의 고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베티 블루] 디렉터스 컷은 베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다가갈 것이다. 더불어 이 영화가 발표된지 14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베아트리체 달의 매혹적인 눈빛은 비디오와 시네마데끄를 넘나들며 '베티'를 외쳤던 수많은 매니아들을 또다시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