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영화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그것을 줄구장창 읊어댈 생각은 전혀 없다. 관심은 누가 가장 세고 강하며 끝까지 살아 남아 그 위력을 지속하는가에 있다.(누가 더 매혹적인가도 포함시키겠다. 매력도 스파이에겐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이다.) 40년 전통의 007 제임스 본드, <미션 임파서블>의 이든 헌트, 스파이의 자기 패러디 <오스틴 파워>의 오스틴이라는 특별한 변종 그리고 새로운 혈통의 스파이 <트리플 X>의 젠더 케이지까지 다양한 각자의 필살기를 들고 배치되어 전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종횡무진 활약중이었다. 이제 드디어 할리우드에서 가장 지적이고 젠틀한 배우로 소문난 맷 데이먼도 근질거리는 몸을 참지 못하고 수개월간의 강도높은 체력 및 무술 훈련을 거쳐 스파이 대열에 합류했다. 내 이름은 제이슨, 제이슨 본.
지중해 한 가운데 푸른 심연의 바다. 헤쳐나가야 할 폭풍우와도 같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지 못한 채 홀홀단신 외롭게 둥둥 떠 있는 남자. 총알 두개는 등에, 스위스 은행 구좌번호가 적힌 캡슐은 엉덩이에 쑤셔넣어져 있는 이 남자는 누구일까? 그를 건져낸 이탈리아 어부들은 질문을 던져보지만 그 자신도 모르는 이름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지워진 기억을 되짚어가는 ‘Who Am I?’ 무비의 측면에서 <본 아이덴티티>는 이렇게 썩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된다.
톰 클랜시와 더불어 첩보, 전쟁 소설류의 거두로 불리우는 로버트 러드럼의 <본 서프러머시>,<본 얼티메이텀>으로 이어지는 ‘본 3부작’의 시발점인 <본 아이덴티티>는 ‘덕이 감독하지 않았으면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맷 데이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덕 라이먼 감독의 연출력에 의해 어느 첩보 액션 영화 부럽지 않게 훌륭한 모습으로 영화화되었다.
이국적인 도시들의 풍경 그리고 유럽의 취리히, 파리 등의 각 거점을 옮겨다니며 선보이는 가라데와 킥복싱의 조합인 ‘칼리’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무술 액션, 정비상태가 불량해 보이는 오스틴 미니를 몰고 파리 경찰을 따돌리는 카 체이스 장면 및 수싸움을 벌이는 쫓기는 주인공과 암살자들. 특히 액션 장면의 적절한 촬영, 편집에서 비롯되는 리듬감은 놀라울 정도이다. <브레이브 하트>와 <글래디에이터>의 아름답고도 정서적인 액션 장면을 연출했던 닉 파월의 공이 크다. <트리플 X>의 그것이 스펙타클이자 볼거리, 스포츠로서의 스턴트였다면 <본 아이덴티티>의 경우는 주먹맛, 총알맛이 느껴지는 사실적인 타격감의 정통 액션 스릴러 영화이다. 즉 젠더 케이지가 반항적이고 제멋에 겨운 서출(庶出)이라면 제이슨 본은 원조 스파이의 적통, 적자(嫡子)인 것이다. 참! <롤라 런>에서 인상적인 달리기 연기를 펼친 독일 여배우 프랭크 포텐트는 이제 더 이상 빨간 머리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난감한 상태의 스파이에게 얌전하게도 모든 것을 내맡기는 순종형으로 변모한 그녀를 만날 수 있다. 휴우. 정말로 이젠 멋진 '여자' 스파이도 보고싶어요오~
결론을 내기에는 이르다고? 본 사이트에서 진행되었던 ‘역대 최강의 스파이를 찾아라’ 투표에서는 <미션 임파서블>의 이든 헌트(톰 크루즈)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당히 선두를 차지했으며 그 뒤를 익스트림한 스타일을 자랑하는 <트리플 X>의 젠더 케이지(빈 디젤)가 스노우보드를 타고 맹렬히 추격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본 아이덴티티>는 국내에서 이제 개봉을 앞두고 있다. 늙다리 및 무대뽀 스파이 선배들! 잠깐, 거기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