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준 감독이 두 번째 작품을 들고 돌아왔다. <천사몽>이 발표되고 1년 6개월 만의 일이다. 45억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제작비가 투입되고 홍콩 최고의 스타인 여명까지 데려와 만들었던 첫 작품의 실패로 필시 의기 소침해 있지 않을까 생각케 했던 일반적인 예상을 뒤엎고 비교적 단기간에 재기의 기지개를 켠 것이다. 비주얼 적인 면과 스타 마케팅에서 힘을 얻으려 했던 전작과는 달리 이야기와 분위기에 초점을 맞춘 <남자 태어나다>는 때문에 전작에서 보여졌던 박희준 감독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1983년. 마이도. 섬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출세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낙후된 공간. 섬의 가장 큰 어르신이 생일 잔치에서 뜬금없이 한마디를 던진다. "우리 섬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가 한명이라도 나왔으면 좋겠어. 공부 못한 게 한이거든..." 마을에는 비상 소집령이 내려지고, 과연 어떤 이들을 어떤 방법으로 대학에 보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펼쳐진다. 한참 동안 갑을논박 하던 이들이 낸 결론은 체육 특기 제도를 이용하는 것. 그것도 가장 만만해(?) 보이는 권투를 통해서 말이다. 가능성 있어 보이는 청년들이 소집되고 정준, 여현수, 홍경인은 대학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이원종의 지도 아래 권투라는 스포츠를 접하게 된다.
그들이 가진 소박한 꿈들이 과연 이루어 졌을까? 다른 영화들에 비해 내 세울 만한 스타도 없고, 눈이 휘둥그래 질 만큼의 특수효과가 등장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설 때 즘 되면 마음의 온도가 1도 정도 따듯해 짐을 느낄 수 있다. 푸근하면서도 촌스러운 마치 그 옛날 유행했던 불량식품을 먹는 듯한 떨림이 영화 속에서 가득하게 풋풋함을 풀어 놓고 있다.
1983년이라는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며 정겨운 과거 영화 속으로 몰입을 유도한다. 데이트 장소로 줄곧 이용되었던 빵집의 풍경이 등장하고, 지금은 이름도 낯선 고고장의 유치해 보이지만 정겹게 느껴진다. 나팔바지와 백구두, 귀를 덮는 단발머리와 꽃무늬 프린트 남방도 약간의 과장을 통해 웃음을 유발시킨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최고의 히트곡으로 흘러 나오고, 오후 5시가 되면 국기 하계식이 펼쳐지기도 한다. 영화의 분위기를 복고로 몰아가기 위해 전체적으로 오렌지색 계열로 색보정을 한 것도 편안하게 느껴진다. 비교적 다양한 부분에서 디테일 함을 강조하려 했던 감독의 의도는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다만 경상도 사투리의 어색함과 지나치게 과장된 주변 캐릭터들은 최근 한국 영화의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가벼움'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