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에 대한. [어바웃 어 보이]는 말 그대로 소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년이라 함은 나이가 어린 사내아이 고로 포스터에서 휴 그랜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그 통통볼 남자아이에 대한 이야기겠군 짐작한다면, 글쎄. 영화를 보고 있노라니 과연 그 소년이 누구인가, 이젠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왕년의 스위트 가이 휴인가 아니면 발그레한 통통볼인가 도통 헷갈리는 것이었다.
나이를 먹는 척 하면서 몰래 뱉어버렸는지 철이라곤 없는 어른과 궁시렁 궁시렁 잔걱정이 많은, 아이의 탈을 쓴 늙은이의 만남은 코미디의 고전적 수법. [어바웃 어 보이]도 비슷한 설정에서 출발한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정신연령이 뒤바뀐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두 캐릭터의 충돌은 안전하게 웃음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익숙한 수법을 구사하는 데도 불구하고 영화가 내 보이는 속살이 갓 수확한 듯 탱글탱글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물론 그건 그가 직업을 갖지 않았다거나 여우같은 아내, 토끼같은 자식 줄줄이 거느리지 않았으므로, 그리하여 나이에 걸맞게 사회적으로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지 못해서는 아니다. '인간은 섬이다'를 되뇌이며 삐까뻔쩍한 '상품'들로 자신만의 섬을 만들어 가는 그의 모습이 왠지 청승맞아 보이기 때문. 윌은 개인주의자를 자처하며 인간 대신 물질을 선택하는데, 이런 그의 행동은 고립된 현대인이 보이는 '소비에의 집착'이나 다름없다. 인간관계를 물질 소유로 대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고독한 현대인의 공통적인 습성이라는데. 인간관계의 결핍으로 스스로의 감수성에만 집중하는 사춘기적 치기를 성숙시키지 못한 윌은 '현대가 낳은 소년'인 셈이다. [어바웃 어 보이]는 여자마저 물건처럼 싫증나면 바꾸어 버리는 이 30대 후반 독신남의 캐릭터를 통해 현대인의 모습을 꼭꼭 꼬집어 낸다.
이에 반해 우리의 통통볼, 마커스는 다분히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 혹은 어른 입장에서 만들어 낸 전통 효돌이로 그려진다. '엄마를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어' 하며 전교적 망신도 마다 않는 이 미련 순둥이는 또래 아이들이라면 '짱나했을' 옷차림으로 엄마 세대 노래나 흥얼거린다.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마커스도 그러나,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나름의 논리적 사연을 부여받음으로서 그 타당성을 획득한다.
캐릭터 구축에 성공했으니 이제 둘의 조화를 꾀할 차례. 윌은 마커스에게 신발과 CD를 골라주고 마커스는 윌에게 어울려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등 그들은 서로의 관계를 통해 각자의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발전은 느리지만 과정이 경쾌하여 지루할 틈이 없다. 플롯은 무리 없이 깔끔하게 진행된다. 또한 이 영화는 상투적인 가족주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이해를 내세워 '도덕을 가르치는' 함정을 피해간다. 윌은 누구와도 진짜 가족을 이루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혈연을 탈피한 열린 구조로써의 연대 형식을 제시함으로써 시류에 맞는 가치를 보여준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여자, 전화]에서 30대 독신녀들의 이야기를 솔직 담백 아기자기하게 풀어내는 데 성공한 영화가 이제 30대 독신남까지 노린다. [어바웃 어 보이]는 로맨틱 코미디 공동주연으로만 만족해 왔던 '노-마초맨'의 단독 주연 가능성을 입증해 낸 새로운 남자 이야기인 동시에 새나라의 교훈까지 일러주는 현대의 동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