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런던에 나타난 엽기적인 살인마 잭 더 리퍼. 그야말로 '지옥에서 온' 사람처럼 잔인한 수법으로 창녀를 살해하던 그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1세기를 넘어 인간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프롬 헬]은 잭 더 리퍼의 살인 사건에 대한 여러 갈래의 추측 중 한 줄기를 골라내어 영화화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잭 더 리퍼의 어두운 미스테리에 매력을 느꼈다고 밝히는 감독 휴즈 형제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19세기 말 런던의 음습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스크린에 고스란히 옮겨 놓는다. 극심한 가난으로 찌든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뒷골목. 그 곳에 겨우 남은 것은 사나운 욕망으로 으르렁거리는 더럽고 지친 영혼들. 영화는 현실적인 인간의 공포를 안개로 덮인 축축한 풍경에 잘 녹여낸다.
범죄의 원인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캐내려는 영화의 시도는 살인사건의 비밀이 드러나는 후반부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그들 입장에서의)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려는 권력층과, 그러한 음모는 생각지도 못한 채 서로를 경계하는 하층 계급 사이의 불공평한 구조가 대비되는 것. 하지만 결국 이 양극은 팽팽하게 대립되지 못한 채 잭 더 리퍼의 이야기처럼 어둠 속에 묻히고 만다. 그 사이를 넘나들며 홀로 분주하던 중산 계급 애벌린만이 모든 것을 밝혀내지만, 그 역시 개인적인 연민에 지친 채 최후를 맞는다.
따라서 [프롬 헬]은 범인의 정체성보다는 범죄의 맥락을 탐구하려는 영화이다. 여러 명의 용의자를 떠올리고 단서를 수집, 논리적으로 조합하여 범인을 집어내던 다른 스릴러에 비하면 솔직히 좀 재미가 없다. 탐정이 사회적 모순에 덤벼드는 설정에서는-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라- 탐정과 범인 즉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증폭될 법한 두뇌 싸움의 긴장을 느끼기 어렵다. 상대방을 뒤흔들 힘조차 없는 나약하고 무력한 애벌린의 모습은 지켜보던 관객까지 덩달아 힘 빠지게 한다.
[프롬 헬]은 흑인 사회의, 흑인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해 온 휴즈 형제의 작품이다. 시대와 인종을 옮겨 표현되는 그들의 사회적인 분노 '성향'과 여전히 몽환적인 조니 뎁의 연기에 관심을 둔다면 그 늘어지는 지루함도 가뿐히 견뎌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