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아들내미가 갑작스런 심장병 판정으로 오늘 내일을 헤아리고 있는데, 정작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수술 대기자 명단에도 올리지 못하는 아비의 심정이란 오죽하랴. [존 큐]는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의 부모 마음을 '병원 점거'라는 극단적 방식으로 풀어낸 영화이다.
죽어 가는 아들에게 삶을 되돌려 주기 위한 방법은 심장이식 수술뿐이나 그 비용은 존 큐(덴젤 워싱턴)가 당장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한 그의 필사적인 노력은 자꾸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상황은 점점 절박해져만 간다-영화는 이런 전개 이전에 막역한 부자 관계를 부각하며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따라서 이 영화의 전체적인 정체성은 감동의 영역을 공략하는 기존 헐리우드 가족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언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냉소를 보낸다. 존 큐가 도움을 청할 때는 능글맞게 둘러대다가 그가 일을 저지르자 인질극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기자의 얄팍한 의도를 희화화함으로써, 진실의 전달이라는 '도덕적인' 역할보다는 시청률에 편승하여 상업적 이익을 꾀하는 타락한 언론의 현실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 이렇게 [존 큐]는 사회 구석구석에 예리한 칼날을 들이밀며 사회가 고착화되면서 전도된 가치와, 간과되어 온 사회의 책임을 일깨운다.
[존 큐]는 그러나, 다소 문드러진 결말로 아쉬움을 남긴다. 곳곳에서 반짝였던 날카로운 비판 의식이 사회 전복의 계기로 이어지지 못하고 흐지부지 헝클어진 채, 다만 개인적인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고 마는 것. 존 큐의 총은 결국 혁명을 수행하지 못한 채, 관객의 카타르시스에 충성하는 장치로 머무르고 만다. 사회를 변혁하기란 개인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막막한 심정의 대변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행복한 결말로 관객의 구미를 당기려는 장르영화의 한계가 더 역력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존 큐] 역시 헐리우드 자본으로 탄생한 대중적 오락 영화의 형제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