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데뷔 60주년 맞은 안성기 “오랫동안 일하는 게 꿈이다”
2017년 4월 17일 월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꽃 기자]
영화배우 안성기가 13일(목)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마련한 데뷔 60주년 기획전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展> 개막 행사에 참석해 자신의 연기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에서 아역으로 데뷔한 안성기는 연기 인생 60주년을 맞은 지금까지 1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국민배우’ 수식어를 얻었다. 드라마의 단역으로 한 번 이름을 올린 것을 제외하면 오직 영화에만 출연했을 만큼 영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그는 스크린쿼터제 폐지 문제 등 영화계 이슈에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이외에도 1993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된 후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가는 등 영화 외적인 사회활동도 꾸준히 보여주고 있다.

<하녀>(1960) <바람불어 좋은 날>(1980) <만다라>(1981) <고래사냥>(1984) <하얀전쟁>(1992) <투캅스>(1993)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라디오스타>(2006) 등 배우 안성기가 출연한 27편의 작품을 상영하는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展>은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4월 13일(목)부터 4월 28일(금)까지 14일간 진행된다.

아래는 기자회견 전문.

Q. 자리에 모인 분들을 위해, 간단한 인사말을 부탁드린다.

A. 지난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60주년 기획전을 진행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는 슬쩍 넘어가듯이 지나치는 행사가 될 줄 알았다. 자꾸 획을 긋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부담스럽지 않은 방법으로 진행하고 싶었다. 오늘 보니 생각보다 많은 분이 오셨다. 굉장히 많은 축하를 해주셔서 고맙다. 사실 나에게 관심이 많은 분은 내 정확한 나이를 알고 있지만, 작품에서는 대개 5살에서 10살까지 젊은 역할을 맡기 때문에 여전히 50대 중반으로 알고 있는 관객도 있다. 그런 면에서 (60주년을 명기한) 이번 행사로 나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는(웃음) 농담도 한번 해보고 싶다.

Q. 60년간 130개가 넘는 영화에 출연하셨다. 그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꼽을만한 작품이 있다면.

A. 기자들은 대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품이 뭐냐고 묻는데, 한 가지만 고르라면 거의 고문에 속하는 것이고.(웃음) 시대별로 한 번 따져보겠다. 꽤 된다. 아역으로 출연했던 작품은 내 의지로 선택한 게 아니라 차치하고, 성인이 돼서 평생 영화를 하겠다고 결정한 후에 선택한 작품부터 말씀드리겠다. 일단 이장호 감독과 함께한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이 내게 굉장한 의미가 있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거쳐오다가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당대를 관통하는 작품이다. 임권택 감독과 처음 만난 <만다라>(1981)도 상당히 좋아한다. 전 세계에 예술적인 작품으로 많이 알려졌다. 많은 관객과 만난 첫 영화는 <고래사냥>(1984)이다. 80년대에 주로 같이 작업을 했던 배창호 감독 작품이기도 하고, 남녀노소 전부 좋아해 줘서 기억에 남는다. 그러고 나서 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학과를 졸업했다. 요즘에는 ‘주어지는 대로 하겠다’고 말하지만 그때는 더 나이를 먹기 전에 베트남전에 참전한 병사의 모습을 꼭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소설가 안정효 선생의 <하얀전쟁>이 출간됐다. 당시 정지영 감독과 <남부군>(1990)을 촬영하고 있을 땐데 내가 먼저 그에게 책을 권했다. 그렇게 해서 베트남전을 다른 시각으로 뒤집어서 바라보는 <하얀전쟁>(1992)을 찍게 됐다. 착하고 순수한 역할을 주로 연기하다가 <투캅스>(1993)라는 작품으로 망가지고 부패한 경찰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연기의 폭을 넓혀준 작품이다. 어휴, 지금 너무 많이 말했죠?(웃음)

나이가 들면서 주연에서 조연으로 입지가 변화하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연착륙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작품이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였다. 비중은 적지만 존재감이 있는 역할을 맡아서,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은 이것이라고 마음먹게 한 작품이다. 또, 강우석 감독과 함께한 <실미도>(2003)는 한국영화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기쁨을 준 영화다. 당시 어떤 배우가 내게 “당분간 이 기록은 안 깨지겠죠?” 라고 물었는데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영화를 하는 동안 처음 나온 기록인데 이게 깨지겠니?”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바로 두 달 뒤에 <태극기 휘날리며>(2003)가 기록을 깨더라.(웃음) 마지막은 이준익 감독과 한 <라디오 스타>(2006) 다. 조그만 영화지만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아무래도 나와 닮은 캐릭터를 연기해 애정이 가는 것 같다. 다 말하고 보니 너무 길었다.(웃음)

Q. 요즘 관객은 선생님이 아역 배우 출신이라는 걸 모르는 경우도 많다. ‘천재소년’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던 아역 배우 시절의 경험을 공유해준다면.

A. 어릴 때는 연기가 뭔지 전혀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다.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요즘에는 너무나 연기를 잘하는 아역 배우가 많지만 그때는 전쟁이 막 끝난 뒤라 많지 않았다. 신문광고에 ‘천재소년 안성기’라는 문구가 나오기는 했는데(웃음) 그건 선전용이었지 실제로는 그런 것하고는 거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웃음) <하녀> 같은 필름을 보면 오히려 어리숙하고 어린아이다운 모습을 보여줘서 좋았던 것 같다. 집안의 막내 같은 느낌을 줬기 때문에 귀여워해 주셨을 것이다. 연기를 야무지게 해내야 되겠다는 생각은 그 당시에는 별로 못했다. 근데, 잘하긴 했나 보죠? 그렇게 소문이 난 거 보면.(웃음)

Q. TV 드라마나 연극에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다고 들었다. 그 점을 지키는 이유가 있는지.

A. <바람불어 좋은 날>을 하고 난 다음에 <형사>라는 TV 수사 드라마에 범인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50분 분량을 하루는 야외촬영, 하루는 스튜디오 촬영으로 이틀 만에 끝내는 속도감 있는 작업이었다. 그래서인지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하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계속해서 얼굴에만 카메라를 들이대더라. 영화 같으면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각도를 활용하고 조명도 주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나하고는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작업이구나 싶었다. 영화는 50분 분량을 만들기 위해서 두 달은 찍어야 한다.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있고 상대 배우와 대화를 나눌 여유도 충분하다. 그 재미 때문에 영화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은 드라마 역시 비슷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잠 잘 시간도 없이 촬영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어휴, 참 끔찍하더라고. 그쪽도 촬영 여건이 조금 더 좋아졌으면 싶다. 무엇보다 영화만 계속 해왔던 건, 예매를 하고 극장을 찾아와서 자리를 골라 앉는 귀찮은 선택을 해주시는 관객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컴컴한 자리에 앉아서 자기를 감동시켜달라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소중하게 느껴진다.(웃음) 그래서 영화를 좋아한다.

Q. 존경받는 선배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감정이 드는지.

A. 아마도 후배들은 영화 이외의 문제에서는 뒤로 빠지는 경향이 있는 내가 영화와 관련된 문제만큼은 앞장서서 나서는 모습을 좋아해 준 것 같다. 스크린쿼터제 폐지 이야기가 나올 때 특히 그랬다. 앞장서서 무언가를 외치는 게 너무너무 힘들고 나랑 맞지 않는데도, 영화를 위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연기자로서 내 역할을 했다. 그런 태도를 존중해주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사실 내가 군대에 다녀오고, 성인이 되어서 영화를 다시 시작할 때는 우리 영화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너무 안 좋았다. 영화를 하는 사람도 존중받고, 동경의 대상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해보겠다는 다짐을 상당히 많이 했다. 그래서 검열이 많던 80년대에도 사랑 영화보다는 70년대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을 주로 선택하려고 했다. 당시 사랑 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지만 의도적으로 피하기도 했다.

Q. 유니세프 활동 등 영화 외적인 역할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A. 영화 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세 가지다. 먼저 유니세프 한국 위원회는 94년에 생겼지만 80년대 후반부터 개인적인 인연이 닿아 친선대사 역할을 하게 됐다. 나는 전쟁 이후 유니세프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세대다. 우리처럼 어렵게 사는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역할을 맡게 됐다. 앞으로도 도움이 된다면 계속할 생각이다. 또 하나는 신영균문화예술재단을 맡아 관련 활동을 하는 것이다. 의미 있는 단편영화를 만드는 젊은 영화인을 지원하고, 연말에는 신영균예술문화상을 통해 한 해 동안 열심히 활동한 영화인을 격려한다. 마지막은 지금까지 15년간 이어오고 있는 아시아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의 역할이다. 영화계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이들을 지원하는 데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연기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활동도 중요하다. 요즘 배우들이 사회봉사활동에 많이 참여하는데 참 바람직하다고 본다.

Q. 한국영화를 상징하는 배우로서 늘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을 것 같다.

A. 마치 바르게 사는 게 이상하다는 듯이 말씀을 하시는 것 같다.(웃음) 앞서 말했듯이 영화에 대한 좀 더 좋은 인식이 생겨나길 바랐다. 때문에 나 자신을 굉장히 다그치고, 또 무엇이든 자제하면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신경을 많이 쓰면서 산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 스스로의 성격이 그런 방향과 크게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중간에 피곤해서 관뒀겠지.(웃음)

Q. 영화인으로서 앞으로 꿈과 목표가 있다면.

A. 오랫동안 일 하는 게 꿈이다. 내 노력으로 가능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르겠다. 그게 가장 큰 숙제다. 나이를 더 먹어도 사람들이 영화에서 나를 보고 싶어 할까? 배우로서 계속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의문이지만, 노쇠한 느낌보다는 굉장한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이미지를 준다면 오래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내 선배님들이나 동료들은 일찍 현장을 떠나셨다. 그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계속 영화를 하면 좋을 텐데 전부 사라진다. 자꾸만 혼자 남는 느낌이 들어 굉장히 외롭다는 생각도 든다. 아쉬운 일이다. 내 뒤의 후배들이 나를 보고 ‘저 정도 나이까지도 연기할 수 있구나’ 하는 역할을 내가 해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

Q. 과거에 비하면 한국 영화산업의 규모도 커지고 촬영 여건도 좋아졌다. 그럼에도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A. 90년대 초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이루고 영화계에도 대기업 자본이 들어왔다. 해외에서 영화를 공부한 사람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시너지가 일어나던 때다. <쉬리>(1999) 이후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섰다고 표현들 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얻은 게 많다고 생각한다. 영화산업이라는 파이가 커졌기 때문에 배우든, 스탭이든 삶이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잃은 것도 분명하다. 예전에는 같은 작품에 몸담는 사람들끼리 식구, 또 가족 같은 느낌이었다. 대가족이 핵가족화되듯이 영화계도 그렇다. 또 아쉬운 게 있다면, 나이 먹은 영화인들이 도태된 것이다. 그건 정말 마음이 아프다. 대기업이 영화에 많이 투자하다 보니 유능하고 젊은 친구들과 일하는 걸 선호하고, 또 우리 사회가 유난스러울 정도로 나이를 많이 따지는 것 같기도 하다. 선후배 개념, 세대를 나누는 분위기에 익숙하다. 하지만 영화 같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잠자는 남자>(1996)라는 일본 영화를 촬영할 때는 나이 든 분부터 머리에 노란 물을 들인 젊은 친구까지 현장에서 함께 일했다. 70대 중반의 편집기사와 20대 초반의 의상 담당이 친구처럼 잘 지내고, 서로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 하더라. 물론 담배를 피우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 자체를 아주 어렵고 불편해하지 않나.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그런 현장 분위기 덕분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같이 머리를 맞대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 같다. 우리 영화계 종사자들은 젊어서 좋긴 하지만, 나이 많은 선배들은 모두 현장을 떠나게 되는 아픔도 경험했다. 지금까지는 그래왔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Q. ‘국민배우’라는 호칭에 대한 평소 생각은.

A. 90년대 중반 씨네21에서 ‘국민배우’라는 호칭을 처음 썼다. 계속 불리니까 그러려니 하고 지내고 있다.(웃음) 국민배우라고 불러주는 건 정말 그렇게 살아갔으면 하는 대중의 바람이 담긴 표현이 아닌가 한다. 굳이 애정이 어린 표현에서 벗어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착실한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해준 말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와 잘 맞아 떨어지는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웃음)

Q. 팬과의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있는지.

A. 난 팬클럽이 없다. 나에게 죽자 살자 매달리는 팬도 잘 못 뵌 것 같다. 미소를 띠고 목례하면서 지나가는 식이다. 그런 점을 늘 고마워하고 있다. 연탄불처럼, 확 타오르지는 않지만 은은한 온기를 한결같이 보내주는 것 같다.

Q. 마지막으로 데뷔 60주년 소감을 전해달라.

A. 본래 옛날이야기를 잘하는 편이 아닌데 자꾸 ‘60년’ 그러니까 옛 생각이 좀 나긴 난다.(웃음) 고인이 된 분들의 얼굴도 좀 떠오른다. 좋든 나쁘든 그분들이 있었기에 한국 영화계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틀림없다. 나 역시 그분들의 귀여움과 사랑을 많이 받아서 지금 같은 배우가 됐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후배들에게 사랑을 많이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

● 한마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진심 어린 미소를 짓게 만드는 국민배우 안성기, 연기 인생 60년에 존경을 담은 박수를 보냅니다.


2017년 4월 17일 월요일 | 글_박꽃 기자(pgot@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0 )
1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