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가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파격적인 성애의 묘사로 화제가 된다면, 거기다가 그 표현의 위험수위로 상영여부가 논란이 되고, 그 동영상을 보기 위해 홈페이지에 접속이 폭주한다면, 그 영화는 영화가 정말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떠나서 우선 '벗고 나오는 영화' 라는 저주(?)를 받게 된다. 잔다라는 그런 저주를 충분히 받을 만한, 그리고 받고 있는 영화다.
하리수의 노랑머리와 우리를 지나치게 실망시킨 썸머타임 이후 최근 들어 딱히 관심을 가질만한 충격적인 영화가 없던 관객들에게 잔다라는 성적 충격을 만끽하기에 참 반가운 영화다. 음란성 시비 때문에 태국에서 30년 동안 판매 금지됐던 소설을 원작 삼아 만들어진 이 영화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국내 개봉까지 끊임없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어두운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한 소년이 있다. 이름 역시 저주 받은 잔다라.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은 이 소년은 죽은 어머니 대신 이모에게서 모정을 느끼려 한다. 이모가 여동생인 카우를 낳고 나서 그는 동생에게서조차 멸시를 받는다. 아버지의 연인인 분렁 부인이 집안에 들어오면서 잔다라는 분렁 부인과의 육체관계에 탐닉하게 되고 첫사랑인 히아신스와 순수한 사랑을 키우기도 하지만 카우의 거짓말로 집에서 쫓겨 난다. 그러나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한 카우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상속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결국은 가장 증오했던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의 자신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에서 정말 저주 받은 것은 잔다라의 가족이다. 아버지와 딸, 아들과 새어머니, 오빠와 여동생, 여동생과 새어머니. 이 가족은 오로지 섹스관계로만 얽혀 있고 섹스로만 그 형태를 유지한다. 행여나 이 가족의 성 관계도를 그려볼 생각을 한다면 정말 극으로 치닫는 이 가족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주변에 널린 것이 남자, 여자인데 왜 굳이 모두 그렇게 가족 안에서 해결하려 했는지 납득할 수 있는 길을 아쉽게도 감독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게다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인물에 대한 묘사가 너무 단편적이고 보편적이고, 적지 않은 등장 인물들에게 조금씩 시간을 나누다 보니 정작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대부분 잔다라의 회상과 나레이션으로 처리된다. 이해하기는 쉽지만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영화를 보고 머리에 남는 것은 몽환적인 분위기의 애무와 성애의 장면들, 벌거벗은 육체들과 신음소리 뿐이다. 어쩌면 감독 역시 자신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을 종려시의 신음소리에 취해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잔다라는 감독이 말하듯이 여흥을 위한 영화이다. 어린이나 종교인은 보지 말라는 배려를 잊지 않듯이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은 잔다라가 검열의 손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음의 의도대로 잔다라를 만들었다. 잔다라가 첫사랑 히아신스의 옷소매를 수줍게 잡고 가는 모습은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하고 그 순수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특히 잔다라가 분렁 부인의 등을 얼음으로 맛사지 하는 장면에서는 누구나 침을 꼴딱 넘기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한번 쥐었다 폈다 하지 않을 수가 없을 만큼 이 영화 최고의 장면이다. 많은 남성분 들이 그 순간 잔다라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만큼..
잔다라는 안타까운 영화이다.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한 남성중심의 세계, 철저한 주종관계 속에서 본능을 억압한 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사회제도의 모순에 대해 감독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은 알고 있었을까? 관객은 가족관의 성관계, 동성애 등 영화 전체에 넘쳐흐르는 페로몬에 넋이 나가 감독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한다. 마지막 잔다라가 말하는 젊은 날의 정열을 관객들은 120분의 러닝타임 동안에 과연 얼마나 이해했을까. 다행인 것은 흥행 감독다운 연출력으로 그 성애의 향연이 추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