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다. 내 스스로 기분이 매우 좋아 내가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 갑작스레 잠을 깨니 틀림없이 예전의 장주였다. 장주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나비인 내가 장주가 된 꿈을 꾸었는지 알지 못했다. 사람과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별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만물의 변화인 것이다."
"꿈을 꿀 때는 꿈인 줄을 모른다. 어떤 이는 자기가 꾼 꿈을 해석하기도 하다가 깨어난 뒤에야 비로소 꿈인 것을 알게 된다. 장차 큰 깨달음이 오니 그 때에는 생명이야말로 큰 꿈인 것을 우리가 발견한다."
[디 아더스]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머리 속 한 자락에 웅크리고 있던 장자의 '호접지몽' 이야기가 슬금 솟아올랐다. 장자가 나비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꿈을 꾼 것인지. 언뜻 보면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교과서에나 자리잡고 있을 법한 이 고루한 화두를, [오픈 유어 아이즈]의 감독 .....는 공포와 스릴러를 빌어 섬찟하게 풀어낸다.
[디 아더스]가 진실과 허구의 아슬한 경계에 위태롭게 놓인 작품이라고 전제해 보면, 영화 속 대립구도들이 툭툭 또렷해진다. 우선, 빛을 보지 못하는 아이들을 통해 빛과 어둠의 관계를 짚어낼 수 있다.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침침한 실내에 갇혀 있는 아이들(혹은 우리들)은 빛과 어둠, 즉 진실과 허구를 극명하게 상반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투명한 창문으로 넘어 들어오는 빛을 어머니에 의해 차단당함으로써, 빛과 어둠 사이의 어슴푸레한 변화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앤과 니콜라스는 빛의 이면이 어둠일 수 있다는,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닫힌 흑백논리의 틀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지침을 간단히 설명해 놓은 책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이 제 스스로의 답을 헤아려 나갈 수 있도록 숱한 물음을 품고 있는 책이기에, 감독은 성경을 통해 그레이스-인간이 규정한 한 가지 해석에 매달리는 맹목성-를 깨우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비밀이 밝혀진 후, 자신의 소신에 늘 당당하던 그레이스의 흐릿한 독백 "엄마도 잘 모르겠구나, 무엇이 옳은지." 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디 아더스]에서는 유난히 '여성'이 맥을 이룬다. 집안의 질서를 정돈하는 역할은 전쟁에 나간 남편 대신 그레이스에게 부여되고, 세 명의 하인들 중 의지를 조종하는 사람은 밀스 부인이며, 어머니의 가르침을 거스르며 생활을 개척하는 아이도 딸인 앤이다. 이제까지의 세상을 남신이 지배했다면, 앞으로는 여신의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한 여성학자의 조심스러운 예지가 문득 떠오른다. 그것은 단순히 세상의 무게중심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겨 간다는 예언이라기 보다는, 유일신 중심의 종교에서 벗어나 좀더 다양하고 풍요로운 '믿음'을 접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