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어른과 성숙한 아이의 만남. 여타 성장영화에서 종종 발견되는 이 ‘조화로운’ 인연은 <차스키 차스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놀러갔던 그리스에서 매끈한(매끈하다 못해 느끼한) 남정네에게 홀딱 빠져 얼떨결에 바캉스 베이비를 출산한 차스키의 엄마와, 매사 영리하고 대견한 우리의 꾀돌이 차스키.
차스키는 아빠를 알지 못하지만, 항상 아빠를 의식한다. 아빠에게 중얼중얼 혼잣말을 걸고, 그가 살고 있다는 그리스의 언어를 배운다. 언젠가 아빠를 만나면 함께 잠수하려고 몰래 수영장에 잠입하기까지 한다. 차스키에게 ‘아빠’는 상실되어 있는 강력한 지배력이다. 이것은 ‘억압’이자 ‘보호’이며, 어린 차스키는 경험해 보지 못한 ‘아빠’를 늘 동경하고 희망한다.
<차스키 차스키>가 갖는 ‘성장’ 영화로서의 요소는 바로 이 강박관념(동경, 혹은 부정)을 깨뜨리는 과정이다. 아빠를 현실로 맞닥뜨린 후, 차스키는 환상의 붕괴를 경험한다. 막연한 환상이 조각남으로써 아이는 실재의 세계로 접근해간다. 아이에서 어른으로의 성장이란 환상을 떨치고 현실을 직시하며, 그 모순까지도 아우르는 것이다. 차스키는 제 어린 동경과 어긋난 ‘아빠’를 수용함으로써 짐짓 의젓한 모습으로 자라난다.
차스키가 스스로의 내면에서 성장의 갈등을 다듬는다면, 불량 학생은 외부의 도움으로 그 갈등을 해소한다. 그의 조력자는 다름 아닌 차스키의 엄마이다. 그녀의, ‘어머니’로서의 여성성은 한 아이가 겪는, 여린 마음이 홀로 사그리기 벅찰 만큼 치열한 성장의 아픔을 다독인다. 어머니는 위안과 포용력의 상징이다. 차스키의 엄마가 불량 학생을 부둥켜안아 주는 장면에서 우리는 아버지로 나타나는 엄격한 이성보다 어머니의 포근한 감성이 세상의 매듭을 풀어나가는 해결책이 아니겠냐는 질문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이 영화의 감독이 여성이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스웨덴의 신예 감독 엘라 렘하겐은 영화 자체도 섬세하고 따뜻한 ‘여성의’ 손길로 엮어낸다. 아이들의 허구적 아버지의 대안으로 진정한 ‘여성다움’이라는 열쇠로 제시하는 <차스키 차스키>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페미니즘을 담고 있는 영화라 하겠다.